6.2일> 토마시를 보면 참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가까이하기에는 무겁고 멀리하기엔 가볍네
<본질=자유>
프란츠가 난생처음으로 느꼈던 독립된 인간,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이 바로 집단수용소로 표현하는 테레자.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인간의 본질은 자유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이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 제 심신을 맡기고 공동체와 공존하기 위해 본질, 그 자유를 잠시잠깐 잊어버린다. 공존의 세상에서 살아가던 인간이 자신의 본질이 자유임 다시 알아차리는 순간, 삶의 혼돈과 마주하게 된다. 혼돈은 불안, 긴장, 두려움을 몰고 온다. 그래도 회피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이 혼돈이 다시 나의 본질을 마주 보려는 시작일테니까. 혼돈의 끝에는 나의 본질, 자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토마시에 선택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고 싶었던 걸까? <다 알아! 결국 너도 이런 마음이잖아!> 설사 당신이 다 아는 그 마음을 내가 느꼈다고 하더라고 그가 다 아는 마음처럼 선택하고 싶지 않은 반감이 생긴다. 평가와 판단, 보이지 않는 수갑이요. 창살 없는 감옥이랴.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인 동시에 상호의존적인 존재다. <봐라. 너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느냐>며 상호의존적이길 바라는 인간 앞에서 나는 어떻게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내 삶에서 반드시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보다도 내 무의식 속에 깔려있는 es muss sein을 먼저 알아차려야겠지.
그래 모든 선택은 존중받아야 해
키치 (Kitsch) :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
요즘 챗gpt를 사용할 때 <질문>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활용의 질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럼 내 삶을 좀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 밀란 쿤데라는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 일고했다. 나는 전체주의적 키치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나에게 어떤 식의 질문을 던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