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 아네스

‘착한 아이’

by 아가다의 작은섬






여자들의 임신․출산 이야기

남자들 몇 명만 모이면 군대 이야기가 꽃을 피우듯, 엄마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나오는 임신‧출산 이야기, 여느 이야기보다 긴박하고 스릴이 넘친다. 하고 또 해도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남자들 군대 이야기랑 참 비슷하다.


서른한 살, 그리고 임신

13년이라는 사회생활을 그만두고 싶었던 시기, 때마침 첫째 아이 아네스가 내게로 찾아왔다. 결혼을 하면 빠른 시기에 아이를 가져야지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한 달 만에 아이 소식을 들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서른한 살, 그렇게 나는 아네스를 품었다.


‘너 혹시 임신하지 않았니?’

한 달 먼저 결혼한 사촌에게서 ‘너 혹시 임신하지 않았니?’라는 뜻밖의 전화를 받은 건 회사 워크숍을 다녀오는 전철 안에서였다. ‘에~이, 아니야 그럴 일 없어~!’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정확한 주기에 소식이 없었던 터라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전철에서 내려 급한 데로 약국부터 찾아갔다. 설명서에는 아침에 해야 정확하다고 나와 있었지만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시에 나는 가정의학과에서 처방된 약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명한 두 줄,

임신을 확인 한 순간, 처음 느껴지는 생각은‘어떻게 하지? 약을 먹었는데...’ 시댁 어르신들을 모시고 친척 결혼식에 간 남편에게 무작정 전화를 했다. ‘어떻게.. 어떻게..’란 말만 반복하며 우는 나에게 남편은 ‘괜찮아, 제발 울지 마. 금방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라고 말하며 나를 달랬다.


늦은 토요일, 겨우 늦게까지 하는 산부인과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임신 초기 먹은 약은 태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불안했던 마음 그리고 입덧

예상은 했지만 계획하지 못한 만남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호르몬의 변화 때문일까? 부쩍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고 임신 소식과 함께 찾아온 입덧은 음식을 상상만 해도, TV에서 음식만 봐도, 냄새만 맡아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겨워냈다. 그렇게 마음 밑바닥에서 원했던 일, 입덧은 사회생활을 그만두게 하는 핑계로 사용되었다.


뱃속에서도 ‘착한 아이’ 아네스

입덧을 제외하고는 뱃속에 있는 동안에도 정말 조용한 아이였던 아네스.

두세 번쯤 이루어지는 태동검사에서도 움직임이 없어 병원 계단을 몇 차례 오르내리며 조용한 아이를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불안신경증 환자 : 불행으로부터 절대적인 안전이 중요해서 안전감만을 지나치게 추구.

강방 신경증 환자 : 인식과 결정의 확실함이 중요하고, 대략적․임시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100% 확신감을 얻기 위해 무진 애쓰게 된다.

(빅터 프랭클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 277p 유영미)』



보쌈고기

병원에서 예상한 예정일은 3월 3일이었다.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안전을 바랐던 나는 임신육아백과사전이 너덜너덜할 때까지 보았다.


책에서 본 대로 예정일 일주일 전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서오릉 둘레 길을 한 시간을 걸었다. 그리고 3월 1일 새벽에 이슬이 비쳤고 나는 계획대로 집안 살림을 정리했다.


15분마다 규칙적인 진통을 찾아왔을 때, 본능적으로 병원에 가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시댁에 다녀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진통이 시작된 것 같아. 병원에 가야 해. 언제쯤 올 수 있어?’

‘어, 지금 금방 갈게’

‘○○ 언니가 고기! 고기 꼭 먹고 가라고 했어. 보쌈 고기 사와’

‘알았어. 사갈게’


남편이 도착하고 왜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입 속으로 쑤셔 넣듯 보쌈을 먹고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 배 속 아기가 더 힘들어요.’

진통을 시작한 지 8시간쯤 되었을까? 고통을 참지 못해 크게 소리를 지르는 내게 간호사 선생님은 ‘엄마, 그렇게 소리 지르면 배 속 아이가 더 힘들어요.’라고 한 마디 하셨다.


그리고 내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아직 진짜 진통은 찾아오지도 않았다고... 도대체 얼마나 더 아파야 돼?라는 걱정은 기우였을 뿐이었다.


배 속에서도 엄마가 아플까 걱정했던 것인지 아니면 세상 속으로 나오는 것이 두려워서 것인지.. 아네스는 내 배를 살살 두드리며, 책에서 본 대로 11시간 30분의 진통과 30분의 출산 시간을 지키며 예정일보다 하루 앞 서 세상에 태어났다. 그 시간 동안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일은 없었다.


가족이지만 아프다.

이 작은 생명을 어떻게 할까? ‘난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같다. 산후 조리원에서 집으로 온 날. 목욕시키다 떨어트리면 어떻게 하나?! 불안함과 예민함은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퇴근하고 매일 그리고 주말마다 시댁에 다녀왔다. 야속하더라...

참다 참다 ‘나 죽을 것 같아’ 울부짖으니 요셉은 털썩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으며, ‘엄마가 암이야. 유방암 말기래..’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파도 아프다 말할 수 없었던 시기,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가 없었던 나날들..

한쪽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쪽은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 도 애쓰던 시절이었다.


결혼하고 한 달 만에 스스로 찾아온 아이.

배 속에서도 순하고 얌전했던 아이.

예정일보다 딱 하루 먼저 태어난 아이.

11시간 30분 진통과 30분 출산 시간을 지키며 태어난 아이.

엄마에게 어린이집, 유치원, 지금 초등학교까지 바르다 소리만 듣게 해 준 아이.

무슨 일이든 꾸준히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아이.


언제나 ‘착한 아이’였던 아이가 착한 아이를 내려놓을 때가 되었음을 내게 알려올 때 나는 분노했다.


아이의 변화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내가 통제하고 있는 안전한 경계를 깨는 행동으로 보였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변화란 두려움에 대상일 뿐이며,
무엇을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은 나를 더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네스는 엄마보다 용감했다.

‘엄마, 엄마도 노력하는 것 같아서 저도 노력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엄마가 소리 지르고 화내시면 저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엄마 눈에는 안 보이지만 저도 노력하고 있다고요.’


아네스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내게 소리쳤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난 노력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노라!!! 그러니 엄마도 더 이상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세요! 제발요!

라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 뒤로 나는 책임과 배움의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은 불안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끔 불안이 내게 찾아오면 나는 아네스를 바라본다.


아네스는 언제나 내게 변화의 성실함을 알려준다.


2022.4월쯤 서랍 속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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