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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붙는 감정들>

독서일기(2024.08.19. 월)

by 아가다의 작은섬


달라붙는 감정들(일상적 참사는 우리 몸과 마음에 무엇을 남기는가)/의료인류학연구회 기획/김관옥, 김희경, 이기병, 이현정, 정종민/아몬드/사회문제일반/225p


'열이 나면 받아줄 수가 없대요'_의료관료주의의 무심함과 기다림의 사회적 가치 <김희경_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37p 영국 국립의료제도(이하 NHS)의 기본 이념은 누구나 치료비 걱정 없이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는 일이 없이 의료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41p 기다림은 국가각 제공하는 보편적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누리기 위해 '시민'으로서 거쳐야 할 절차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관료주의적 무심함으로 무장한 구조의 처분을 무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순응적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42p '열이 나면 2~3일 집에서 지켜보라고 했던 그 말을 그대로 지킨 거예요. 세월호 아이들도 그랬던 거잖아요.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만 믿고 그렇게 기다렸던 거죠'


김희경 교수님은 2020년 3월 한참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엉망칭찬일 때, 코로나 환자로 의심받다가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사망한 17살 정유엽 군과 그 가족들이 겪었던 내용을 글로 적으셨습니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방역지침을 따랐고, 나라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줄곳 믿고 기다렸을 정군과 가족들. 믿고 기다린 시간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뉴스기사에서 정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알게 됐지만, 그 뒤에도 정부의 무심함과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남은 가족들이 아직도 아파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정군의 아버지는 정군이 떠난 뒤 암에 걸리신 와중에도 이 나라에서 정군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군의 아버지가 단식하고, 도보행진을 하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정군의 죽음이 의미 있기를 바라며 정상규명을 위해 처절하게 싸울 때,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는 나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발과 손으로 다져간 아들의 생명_참사 이후 부모의 일상 <김관욱_덕성여자대학교문화인류학과>

47p 누군가 나에게 참사를 정의해 달라고 하면 '피할 수 있었던 비통한 죽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어떤 참사도 피할 수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약 10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참사(가습기, 세월호, 이태원 등)는 모두 '사고'가 아닌 '사건'이었다.

53p 정군의 죽음 이후, 세상이 아들의 죽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일상이 없을 만큼 온 지역을 뛰어다녔다... 중략... 그렇게 마냥 세상의 응답을 '기다리게'만드는 것이 정치권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약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기다림'뿐일 때가 많다.

60p '교수님,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만일 욕을 하고 정말 난리를 쳤더라면, 누구처럼 경찰이랑 병원을 뒤집어 놓았다면, 그랬더라면 우리 아들이 살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가끔 그런 후회를 해봅니다.'

69p 코로나 시기에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유가족들은 공통적인 아픔을 겪었다. 소중한 사람의 마직만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다.

73p 참사를 일상에서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삶의 희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되살리 수 있을까? 답은 여전히 구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버지의 도보행진도, 어머니의 도지기 빚기도, 그리고 비손 공연도 끝내 가장 중요한 희망의 전체조건, 진상규명을 얻어내지 못했다.

75p 오늘날의 일상을 지배하는 정동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바로 약속과 위협이다. 이것은 말로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즉,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약속이란 것을 체감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반면, 그러한 희망을 품을 수 없다는 절망을 체감한 채 살아갈 수 있다.


정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선고를 받고 큰 병원으로 가는 그 순간까지도 남에게 피해가 갈까 교통질서와 운전수칙을 철저히 지켰데요. 정군이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으로 오인받고 응급실에 들어가서 화장되어 나올 때까지 부모님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 그 마음 아무리 상상해도 감히 상상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죽음이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정군과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공사현장에서 심하게 다친 60대 근로자가 가는 병원마다 치료거부를 해서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분 아들이 전하길 아버지는 의식도 뚜렷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아프니 제발 치료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에 응답한 병원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진상규명을 하지 않은 정부와 진상규명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외면한 우리의 책임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그 시절 잃어버린 것들_애도에 관하여 <이기병_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춘천성심병원>

100p 나는 아버지께서 아프시고 돌아가시기까지의 기간 동안 내가 아버지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음으로써 가까스로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비록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지만 아버지의 죽어감에 내가 오롯이 반응하며 겪어냄으로써만 인지할 수 있었던 이 과정이 바로 애도임을 깨닫는다.

108p 애도 의례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를 재구성하며 의미 있는 존재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무질서를 기념하고 재배치한다. 요컨대 이 의례는 산자의 공동체에서 죽은 자를 충분히 추모하면서도, 동시에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를 명확히 구분지음으로써 그간의 혼란과 고통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111p 철학자 자크데리다는 애도의 불가능성을 말하며, 진정한 애도란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략... 그의 친구이자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죽어가는 타인의 죽음은 '책임이 있는 나'라는 나의 정체성 자체 속에서 내게 영향을 미치며 형헌 할 수 없는 책임을 이룬다. 그것이 바로 그의 죽음과 맺는 나의 관계이다'

115p 그렇다면 코로나 19 팬데믹 시절 죽어간 이들과 남겨진 이들 사이에서, 우리 사회가 통째로 상실했던 근원적 감각과 경험을 한데 모아 헤아리고 위로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중략... 이해와 감각이 필요함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참사 앞에서 충분히 애도했을까? 참사 당사자와 그 유족들이 충분히, 마음 놓고 애도할 수 있도록 배려와 존중을 했을까? 나에게 피해올까?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탓하고 몰아붙이지 않았나..


돌봄의 얼굴들_의료와 철학의 언어를 넘어 실천과 삶의 언어로 <정종민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129p 미국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낸시 메이스와 피터 라빈스는 알츠하이머병과 사는 아내를 돌보는 시애틀의 한 남성이 하루가 마치 36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말에 주목했다. 이들은 인지증 돌봄이 사랑과 애정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주의와 관심이 필요해서 하루 36시간, 아니 48시간으로 느껴질 만큼 끝날 줄 모르는 돌봄의 연속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131p 똑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내가 사는 세상과 인지증 당사자가 사는 세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중략... 한마디로 사람들은 돌봄을 건강한 사람이 환자를 일방적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141p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더라도 레이철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도록 시공간적 여유를 주되 늘 곁을 지키는 방식의 '관계적 돌봄'을 이야기했다... 중략... 제이컵은 인지증 당사자인 아내와 함께 하는 삶을 배워간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아내의 지금-여기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했다. 이후 제이컵은 끊임없이 레이철과 함께 어우러지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약하고, 아픈 사람들은 돌봐야 하는데 그 몫을 감당하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코로나19 팬더믹 시기에 돌봐야 하는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돌봄 현장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애쓰셨는지 그 노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애도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반복된다_이태원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김관욱_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154p 사회가, 정부가, 처벌받아야 할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가 혹시 시간은 아니었을까. 마치 바다의 거친 파도처럼 시간이 모든 진실을 덮을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애도 앞에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반복되고 있었다.

156p 떠난 사람을 같은 시간 속에 머물게 하는 것, 이것이 애도의 핵심이지 않을까

164p '애도의 시공간을 국가가 점유'하는 '관제 애도'를 통해 참사는 사고로, 희생자는 사망자로, 진상규명은 보상으로 프레임화 됐다. 분향소 앞에서 면담을 나누었던 유가족은 당시 정부가 만든 '마약 사용자'라는 범죄자 프레임과 언론을 통해 형성된 '놀러 갔다 죽은 사람들'이라는 사고 프레임이 현장을 기억하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가로막았다고 회상했다.

165p 이 증언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거꾸로'이다. 이 말은 피해인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가 오히려 정부와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진짜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하는 '뒤집힌' 상황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166p 그에 반해 왜 참사를 막지 못했는지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며, 되게 유가족에게 피해자임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는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정말 읽을수록 나의 무지와 무심함에 화가 나고, 정부가 참사 희생자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행태에 분노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계속해서 피할 수 있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변화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피해자도 아니고 '진짜 피해자임'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 말미에 한 유족분이 아이의 삶이 오로지 참사희생자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참사 이전에 찬란했던 아이의 삶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변화되지 않고 반복되는 이 참사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나긴 혁명, 그래서 우리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_참사 이후 정동의 갈래들 <이현정_서울대학교 인류학과>

185p 20237월 폭우가 계속되는 날, SNS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던 청년이 이태원에서 죽었습니다. 이태원 리본을 달고 다니던 청년이 오송 지하차도에서 죽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나라입니까?'

187p 이태원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상황이 발생하기 전후에, 무려 120번 넘게 위험을 인지하고 도와달라고 외쳤다. 그런데, 왜 국가는 반응하지 않았을까?

188p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승객들을 버리고 떠나간 선장을 떠올린다. 무책임한 나쁜 놈! 그리고 선장과 선원들만을 구조하고, 승객들에게 대피하라는 방송조차 하지 않았던 해경 123정을 떠올린다. 무능한 해경! 그러나 그들 뒤에는 더 많은 '나쁜 사람들'이 존재했다. 우리는 '그날, 국가가 없었다'

193p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청와대는 기무사를 통해 반대 집회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결집해 의도적으로 혐오 표현을 선동했다.

194p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혐오 정치가 주요한 정치 전략으로 사용되고 있다.

195p 주변의 관람자들은 대치하고 있는 혐오와 비난의 전선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이것을 카롤린 엠케는 '포르노그래픽적 희열'이라고 했다. 그들은 직접 비난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불난 집을 구경하는 '관람객'노릇을 자처하며 전선을 정당화한다.

196p 세월호 유가족 그리고 이태원 유가족,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추상적인 집단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개별 인격체로서의 자격을 잃는다... 중략... 과거의 익숙한 상징으로 덮어 씌워진 채 그들은 끊임없이 '악인들'로, '배제되어야 할 자들'로 '국가에 해로운 자들'로 '집단'으로 호명된다.

197p 많은 피해자가 자신이 참사를 겪기 전까지, 이들을 미워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재난 피해자들에게, 또 현대사의 안타까운 희생양들에게, 무관심했다... 중략... 결국 우리는 정치 전략의 희생양이다'

199p 프로이트에 따르면, 제대로 애도되지 않는 감정은 몸 안에 남에 우울을 형성한다... 중략... 무력감과 우울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정동이다.

202p 무관심은 책임의 반대말이다. 책임은 앞서 말했듯이 응답할 능력을 의미한다.

207p 의미를 상실한 시대, 새로운 방향을 지향하며

208p 유가족은 이렇게 절규했다.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특별법을) 거부한 것도 모자라, 저희를 댓글부대의 먹잇감으로 내던졌습니다.' 이것이 사라 아메드가 말한 '감정의 문화정치'다. 말들 속에는 그럼에도 불만을 품는 집단이라는 낙인이 숨겨져 있다.

209p 참담함은 곧 희망의 상실이다. 희망은 가능성에 대한 감각이니, 절망은 곧 삶의 가능성을 느낄 수없다는 뜻과 같다. 삶의 가능성(의미)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 느낄 수 없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213p 바라건대, 이 책이 일상적 참사로 무너진, 또는 무뎌진 사람들의 여정을 희망의 방향으로 이끌 마주침이 되었으면 한다.


피해자를 혐오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정부와 피해자를 피해자로 보지 않고 혐오대상으로 바라보면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시공간을 초월하는, 원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지 못하고 정치적 기득권자에게 휘둘리며 살아갈까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문제에 무지하고 무심한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나아가 '정부'에게 분노했습니다. '앞으로 사회문제 앞에서 무심하지 않고 앞장서겠다'는 거창한 약속은 못해도 정부의 도구로 전략되지 않고 참사를 잊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 글로 상담하는 상담사 아가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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