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2025.06.23. 월)
글로 상담하는 상담사 아가다입니다
친엄마는 망상에 사로잡혀 남편과 딸을 죽이고 자살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신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딸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살아남은 딸은 정신과의사인 '칼 번햄'에게 입양되었고, 그렇게 '케이트 번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끔찍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케이트 본인의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 칼번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인지 그녀는 10살 이전의 기억을 완전히 상실했다.
케이트의 첫 기억은 '게르니카'를 처음 보았던 순간이다. '게르니카를 처음 본 순간 그것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집어삼켜버렸다.(본문_9p)' 그때부터 양아버지는 케이트에게 친엄마의 망상이 발현되었다고 생각했고, 분홍색 알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자신의 망상을 그림으로 승화시키며 표현했지만, 16살이 되던 해부터 더 이상 '게르니카'는 그녀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 소설은 어린 시절의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조작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케이트는 친엄마의 망상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끔찍한 사건에서 살아남은 아이라는 이야기 속에 갇혀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이야기 자체가 양아버지 칼 번햄이 만들어낸 거짓이었다.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친엄마는 정신병자가 아니었고, 케이트를 집어삼킨 게르니카는 바로 양아버지 '칼 번햄'이었다. 소아성애자인 칼 번햄은 시장에서 어린 그녀를 보자마자 비뚤어진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케이트의 친엄마를 협박해 케이트를 납치하듯 입양하고 16살이 될 때까지 케이트를 반복해서 성폭행한다. 칼 번햄은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마치 그녀 안에 ‘친엄마의 광기’가 유전된 것처럼 꾸며냈고, 그녀의 혼란스러운 기억은 그 조작된 이야기 위에 덧칠되었다.
케이트 그 끔찍한 경험 속에서 정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녀 안에서 조현병이 발현되었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10살 이전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분홍색 약에 의존하게 된 것도 모두 그 성폭력 트라우마의 결과였다.
‘기억’과 ‘진실’ 사이의 무너진 경계 사이에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은 기억을 조작해서라도 자신을 보호하려 하고, 때로는 그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 ‘망상’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케이트 역시 ‘구멍’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한 내면의 공허함과 끔찍한 공포를 잊기 위해 기억을 왜곡하고 현실을 지워야 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피해자의 고통이 단순히 과거 한 시점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폭력으로 인해 생긴 상처는 기억을 파괴하고, 자아를 분열시키며, 평생토록 사라지지 않는 구멍으로 남는다. 그리고 가해자는 그 틈을 파고들어 피해자의 정신까지 점령해 버린다.
소설을 읽고 나서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는 내 기억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에게 있어 기억이 곧 전쟁터라는 사실, 기억 그 자체가 트라우마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기억의 왜곡’이 개인의 정신병리와 어떻게 얽히는지, 그리고 폭력 앞에 무너진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사람은 자신이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트라우마가 남을 만 큰 대단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기억은 나의 생각과 감정에 나도 모르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결국 그것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기억이란 결국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얼마든지 조작되고 덧칠될 수 있다.
■ 조현병 증상과 트라우마의 연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중복되는 증상이 많다. 영국 정신의학 저널(The British Journal of Psychiatry)에 실린 연구(Read, Fosse, Moskowitz & Perry, 2014)에 따르면 조현병 환자들의 50% 이상이 아동기 심각한 성적 학대나 신체적 학대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 트라우마와 기억 왜곡 연구
트라우마 상황에서 인간의 뇌는 **‘해마(Hippocampus)’와 ‘편도체(Amygdala)’**의 기능에 손상을 입는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하지만, 트라우마 상황에서는 과도한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로 인해 기억 저장 기능이 마비된다. 그래서 피해자는 그 경험 자체를 잊어버리거나 **‘왜곡된 형태로 기억’**하게 된다.
심리학자 Elizabeth Loftus의 연구에서도 **“기억은 원본이 아니라 복제본이며, 복제할 때마다 왜곡된다”**고 주장한다. 트라우마 피해자의 기억은 특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거나 지워버리려는 경향이 강하다.
■ ‘게르니카’의 상징과 심리학적 해석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학살을 묘사한 피카소의 작품으로 폭력과 파괴, 비명과 절규를 담고 있다. 케이트에게 ‘게르니카’가 ‘처음 본 순간 그녀를 집어삼킨 존재’로 다가온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억눌린 기억이 그림을 통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트라우마 기억이 특정 이미지나 감각 자극에 의해 돌연 재생되는 플래시백(flashback)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케이트에게 ‘게르니카’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억압해 온 끔찍한 기억의 형태였다.
■ 기억은 이야기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역시 인간의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경험하는 자(self)와 기억하는 자(self)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결국 기억하는 자가 ‘삶’을 결정한다.”
게르니카의 황소/한 이리/은행나무/장편소설/311p
93p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나 자신의 가장 끔찍한 면을 마주할 용기
148p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정말로 두려워했던 것을 바로 이것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내리는 것. 꿈과 현실이 결국엔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
279p '이제야 알겠어. 넌 내 분노였고 수잔은.... 내 죄책감이었어'
282p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알고 싶은 건 정작 알 수 없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만을 알게 되는 게.... 살아가는 일 아닌가 하는.....'
289p 최악의 경우 나는 내 분노와 함께 영영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었다. 칼 번햄의 손에 죽는 것보다 그것이 날 더 두렵게 했다. 내게서 에린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나 자신이 곧 에린이 되어 버리는 는 것.
307p 그런데 왜 여전히 그 모든 게 끝나지 않은 듯 느껴지는 걸까?... 중략... 구멍. 그래, 구멍 때문이야. 당신이 내 머리에 뚫어놓은 구멍, 그것은 당신을 죽인다고 해서 메워질 수가 없는 것이니까. 남은 평생 발버둥 친대도 영영 완전히 메울 수가 없는 건지도 모르니까. 그래, 나는 구멍이었다. 당신에게 하나의 구멍일 뿐이었기에. 나는 구멍이 되었고 그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지. 게르니카의 황소가 뚫고 지나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