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객석의 경계 허물기
'클래식 공연장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 같은 기사의 본래 목적은 클래식 공연 문턱 낮추기였을 것이다. '공연장이 처음이더라도 당황하지 말아요' 같은 안내 말이다. 이런 기사 내용 중 대표적인 건 단연 박수 치는 타이밍 지키기였다. 박수 치는 타이밍은 한 곡이 완전히 끝난 후다. 당연한 말인 듯한데 왜 굳이 안내까지 하느냐 하면, 연주자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을 관객이 곡이 완전히 끝난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악장이 끝나고 다음 악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그렇다. 그때는 박수를 쳐서는 안 된다. 악장과 악장 사이의 박수가 금지된 이유는 몰입 중인 연주자의 집중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실 에티켓이란 박수 그 자체보다는 곡의 악장이 어떻게 구분돼 있는지, 언제 완전히 끝나는지 알고 객석에 들어서는 것이겠으나, 그러지 못했을 경우엔 눈치 게임을 하는 수밖에.
나는 이런 기사의 목적이 클래식 초보들을 위한 기본적인 정보 제공이었음을 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반드시 지켜야 할 것' 같은 제목으로 나오는 기사들이 대중과 클래식 사이에 벽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연주 도중의 대화 소리나, 휴대폰 벨소리나, 연주자와 객석의 집중을 방해할 만큼의 큰기침 소리 등을 내선 안 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예의다. 하지만 연주자와 다른 청중에 대한 존중을 넘어 클래식 공연장에 오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 정도 수준을 갖춰야 한다는 '자격요건'이 생기는 순간 그것은 벽이 된다.
그래서였는지 2018년 칙 코리아(Chick Corea)의 공연은 잊기 힘든 '경험'이었다. 클래식 전용 공연장으로 문을 연 롯데콘서트홀에서의 독주회였다. 롯데콘서트홀에서 수많은 클래식 연주를 들었지만, 재즈 피아니스트의 독주회는 처음이었다.
칙 코리아의 공연은 독특했다. 그는 공연 시작 1분 전까지 셋 리스트를 정하지 않았다. 연주곡목은 공연 팸플릿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러더니 칙 코리아는 무대 위에서 자신이 연주한 곡을 직접 설명했다. 2부에서는 관객과 연주자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렸다. 객석에서 사람들을 불러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관객의 표정을 음악으로 묘사해 웃음을 주고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즉석 잼 연주를 제안하기도 했다. 관객 역시 전공자였는지 익숙하게 칙 코리아와 피아노 한 대를 나눠 연주했다. 칙 코리아는 즉흥으로 곡을 이끌어 나갔다. 자신은 낮은 건반 쪽에서 반주 리듬을 연주하고 관객은 높은 건반 쪽에서 멜로디를 연주했는데 칙 코리아는 관객이 연주한 멜로디를 변주하고, 반대하고 관객에게 멜로디를 유도하기도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연주'라는 걸 기대했다면 이런 장면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 이 모습은 공연장에서 관객과의 호흡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된 순간이었다. 오히려 즐겁기만 했다. 그의 옆에 앉을 수 있었던 이들의 소감은 어땠을까.
그리고 칙 코리아는 앙코르 곡으로 자신의 대표 곡인 '스페인'을 연주했다. 무려 30분 동안. 같은 주에 세계적인 클래식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의 내한 공연도 있었는데, 그는 앙코르로 무려 8곡을 연주해 화제였다. 보통 연주자들은 1,2곡을 연주한다. 연주자들이 청중에게 음악으로 보답하는 마음이 이렇게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클래식 연주자는 곡 수를 늘리고 늘려 한 시간 동안 앙코르 연주를 할 수 있지만, 재즈 연주자는 한 곡만으로도 연주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려버릴 수 있다. 칙 코리아는 관객들에게 멜로디를 따라 부르게 시키고 박수를 유도하며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관객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긴 긴 시간 연주를 이어갔다.
칙 코리아의 공연이 의미 있는 건 그 장소 때문이기도 하다. 실내 공연장, 그것도 주로 클래식 연주장으로 쓰이는 롯데콘서트홀 리사이트홀이기 때문이다. 내가 재즈 공연을 본 장소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같은 야외였거나, 혹은 재즈바였다. 음악에 관심이 그다지 없는 친구들과 가서도 즐길 수 있는 공간, 음악 그 자체보다도 음악을 배경으로 관객은 마시고 먹고 떠드는 공간.
그렇다면 연주자에게 온전히 관심이 집중되는 실내 공연장에서 재즈가 연주되면 야외와는 달리 엄숙할까? 그렇지 않았다. 연주자들은 관객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았다. 브라이언 컬버슨(Brian Culbertson)의 공연에서, 객석은 축제의 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심지어 '호우!' 소리도 지른다. 연주자가 완벽한 연주 후에 받게 되는 기립박수도 있지만 연주 도중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하는 연주도 있다.
사실 클래식 음악회에서도 청중에게 엄격한 침묵이 적용된 건 19세기 이후라고 한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연주하는 동안 귀족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면 자신의 음악에 대한 호의로 받아들여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음악가들이 상위층을 위해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클래식 연주장에서의 에티켓은 현대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니 클래식 음악도 재즈도 사람들이 다가갈 수 없는 '어려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클래식 지평 넓히기'가 업계의 미션이 된 지 오래다. 클래식 음악이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아티스트들도 있다. 이에 대해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클래식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클래식화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그게 결국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 대중화는 음악의 격을 떨어 뜨린다거나, 클래식 음악을 대중적으로 바꾼다는 게 아니라(물론 그런 시도도 포함될 수는 있지만), 대중이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기회부터 넓혀주는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은 대중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고 이미 가정된 상황, 상위층만 누리는 문화라는 선입견을 줄여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재즈의 대중화, 혹은 대중의 재즈화는 클래식과는 또 다를 것이다. 다만 이렇게 무대와 객석이 호흡하는 경험이 우리 안의 어떤 권위주의도 녹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나 역시 대중의 한 사람이기에, 끊임없이 교감하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기사를 쓸 때에도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이는 이슈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살갗에 가 닿는 기사를 써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