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에는 더 잘하는 게 목표인 느리지만 꾸준한 밴드
'협연'이라는 단어는 묵직하다. 나에게 협연이란 피아니스트가 백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무대에 선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취미로 피아노를 친다는 건, 당연히 혼자 연주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나의 방에서 베토벤이나 쇼팽 악보를 펼쳐 놓고 연주하는 것만을 취미라고 생각한 것을 보면, 10대 중반까지 내 머릿속의 피아니스트란 클래식 피아니스트 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 난 '협연'을 한다. 협연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묵직해서 '합주'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합주도 협연이니까. 나의 주말 일정에는 늘 합주가 있다. 매주 일요일마다 2시간씩 친구들과 함께 피아노를 친다. 이름을 짓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리긴 했지만, 일요일마다 함께 한다는 의미로 Sunday Afternoon으로 이름 지었다.
합주실에 모이는 사람은 4명. 피아노를 담당하는 나와 드러머, 베이시스트, 보컬이다. 우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여성이다. 한 때는 모두 비혼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한 명은 결혼을 해서 아이가 벌써 돌을 맞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연으로 연결된 사이이지만, 전공과 직업은 모두 제각각이다. 우리는 MBTI 중 공통된 알파벳을 갖고 있는데 그건 P다. 계획적이고 일정을 칼 같이 지키는 J와 달리 다소 즉흥적이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P들이라, 매주 돌아가면서 합주에 지각을 한다. 하지만 웃으면서 맞이한다. 이 합주의 목표는 '재미있게, 오랫동안 하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생업이 있음을 존중한다. 음악을 취미로 삼는 공통점이 있지만, 음악만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연주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합주 시간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취미인의 특권이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공연을 할 것이라는 목표가 있다. 다만 못 박아 두지는 않았다. 아직 시험을 준비 중인 친구도 있고, 육아에 바쁜 친구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간들이 쌓여 언젠가는 공연을 하고도 남을 만큼의 곡이 쌓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합주실에 모인다. 이렇게 모이기 시작한 게 2016년 11월부터였으니 벌써 5년이 되었는데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은 2019년으로 기록돼 있다. 베이시스트가 결혼을 할 때 신부의 자축 무대로 함께 한 의미 있는 연주였다. 그리고 코로나19 때문에 2020년과 2021년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사실 공연을 한 번 하는 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나도 멋지게! 공연을 하고 싶었다. 아무 목표 없이 합주를 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공연을 더 분명한 목표로 갖고 있는 다른 밴드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게 피아노를 연주만큼이나 중요한 건, 누구와 하냐는 점이라는 걸. 대학 시절에도 몇 번의 프로젝트성 밴드를 한 적이 있다. 공연 자체는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공연이 목표인 밴드였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취미 활동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야 이 시간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느슨한 밴드'가 5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건 이런 성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지금은 밴드 그 이상이다. 궁금한 점이 생겼을 때, 고민을 털어놓고 싶을 때 찾게 되는 친구들이 되어 많은 순간 위안이 되어준다.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한 Sunday Afternoon 채팅방 이름은 지금 '배움과 체력의 방'이 되었다. 배움의 방이 의미하는 건, 4명의 사람들이 각자 다른 분야에 종사하기 때문에 서로가 다른 정보와 지식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많은 것을 배운다. 생활 정보나 사회생활의 팁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영화와 웹툰을 쉴 새 없이 공유한다. 이제는 누구에게 어떤 게 필요할지도 아는 채팅방이 되어버렸다. 체력의 방은 끊임없이 함께 등산을 가자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직 등산을 해본 적은 없지만. 오래도록 합주를 하기 위해 건강과 체력도 챙겨야 한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물론 이렇게 합주를 하면 실력 향상은 더딜 수 있다. 하지만 이 느슨한 밴드를 만날 때마다 나는 우리의 목표는 '마흔 살에 더 잘 연주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날 지인들을 불러놓고 연주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짧고 굵은 성과가 빛을 발하는 시대에, 우리처럼 얇고 길게 가는 사람들도 필요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나는 제1번 취미인 피아노를 평생 즐겁게 배우고 연주하고 싶다. 취미를 1년 하고 끝낼 수는 없는데, 이렇게 함께 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