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 수 없는 세상 속 예쁘지 않은 음악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by isnon


대학생 때까진 MBTI 유형 검사에서 늘 J 유형이 나오곤 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현장 취재 부서에 발령받은 이후부터는 줄곧 P 유형이 나왔다. 예기치 못한 상황은 늘 벌어졌고,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계획이 어긋나 스트레스 받느니, 차라리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반응으로 MBTI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는 걸 이론적으로 증명한 물리학자가 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1927년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는 관찰되기 전까지 여러 가능성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과학 법칙을 넘어, ‘세상은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현대인의 잠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삶은 때때로 의도치 않게 미끄러지기 마련이니.

음악의 세계에서도 예측 가능한 시대에 종언을 고한 작곡가들이 있다. 아르놀드 쇤베르크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의 근본 질서였던 조성과 리듬을 해체해 음악을 불확실성의 세계로 이끌었다. 두 사람의 음악은 전혀 다른 스타일처럼 보이지만,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더 이상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결을 같이한다.

곡의 성격을 분류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조성이다. 장조는 밝고, 단조는 어둡다. 쇤베르크는 그런 조성 체계를 해체해버렸다. 그가 고안한 ‘12음 기법’은 12개의 음을 동일한 위계로 배열해 어떠한 음도 중심이 되지 않고, 장조와 단조로 나뉘지도 않는다. <달에 홀린 피에로>(1912)를 들어보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말하듯이 말하는 ‘슈프레히게장’ 기법, 조성을 벗어난 비정형적 선율, 불안정한 화성을 듣고 있자면 낯설고 불편하다. 쇤베르크는 일부러 이런 음악을 만들었다. 아름다움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의 진실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쇤베르크에게 조화로운 화성은 현실의 불안과 고통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했다. 듣기 불편한 음악이라도, 진실한 감정을 담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https://youtu.be/YbTn7Y9XAhA?si=V1fQF6Wi6FdmRFfi

스트라빈스키는 일정한 박자와 규칙적인 강세를 해체하면서, 음악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음악의 시간적 질서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리듬과 박자를 의도적으로 흔들어버린 것이다. 발레곡 <봄의 제전>(1913) 도입부의 플루트 솔로는 일정한 박자 없이 흐른다. ‘청년들의 춤’ 부분에서는 2/16, 3/16, 2/8 등 박자가 매 마디마다 바뀌고, 강세 역시 일정하지 않아 다음 박자를 예측하기 어렵다. 매끄러운 선율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균형에서 오는 에너지가 돋보이는 곡이다. 스트라빈스키에게 음악은 감정을 표현하는 통로가 아니라, 독립적인 질서를 갖춘 구조였다. 그는 형식과 구조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리듬의 충돌과 반복조차 계산된 장치였다.

https://youtu.be/EkwqPJZe8ms?si=o8ZU3rLpQt9V1i9u

두 사람이 활동한 20세기 초중반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다. 쇤베르크는 조화로움과 완결이라는 고전적 가치는 그러한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은 반면, 스트라빈스키는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예술에서 만큼은 질서를 복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듣다보면 평온함이 아니라 불편함이 느껴지는 이 음악들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공명한다.

‘음악은 아름다워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도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했다. 두 사람 모두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음악적 감각을 제안했다. 쇤베르크는 조화로운 음악이 숨기고 있던 불안을 끌어올렸고,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을 감정의 도구가 아닌 구조의 언어로 바꿨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예측 가능했던 음악의 세계를 낯설고 불확정한 세계로 전환시켰고, 그것은 그들 이후의 모든 음악적 실험의 출발점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 쇤베르크의 음악은 여전히 듣기 어렵다. 그렇지만 불협 속에 머무는 법, 다음 음을 예측하지 않고 기다리는 법,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그대로 펼쳐 보이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해하기보다 그 흐름 위에서 유영하는 법. 이들의 음악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어쩌면 그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 2025년 05년 27일 '카이스트 신문'에 실린 글을 다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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