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되는, 드뷔시

멍하니 있고 싶을 때 듣는 음악

by isnon

‘아, 이 다음엔 다시 C가 와야지.’ 음악을 듣다 보면 이어질 화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때가 있다. 도미넌트(5도) 화음 뒤에는 토닉(1도), 도미넌트 세븐(7도) 뒤에는 해소. 조성 음악은 이런 ‘돌아갈 곳’을 전제로 긴장과 해소를 반복하며 음악을 진행시킨다. 이 흐름이 너무 익숙해, 인간의 본능이 따르는 방향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 회귀 본능을 과감히 무력화한 작곡가가 있다. 시작과 종지, 긴장과 해소를 ‘1도’로의 귀환에 기대지 않고 새롭게 구성한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다.

드뷔시라는 이름은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에 의해 한국 대중에 더 널리 알려졌다. 조성진은 리사이틀 앙코르곡으로 드뷔시의 <달빛>을 자주 연주했고, 두 번째 정규 앨범으로 드뷔시를 택했다. 유니버설뮤직은 이 음반을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소개했다. 수채화 같은 음악이란 어떤 의미일까?

드뷔시의 음악은 형식과 구조, 감정의 기승전결조차 흐릿하다. 자주 연주되는 〈달빛〉도 조성의 중심이 뚜렷하지 않아, 익숙한 음악 언어와는 다른 감각을 남긴다. 드뷔시는 독일 중심의 고전·낭만주의와는 다른, 프랑스 고유의 음악 언어를 찾으려 한 작곡가다. 그는 논리적인 기승전결보다 순간의 감각과 인상을 소리로 번역하는 데 집중했고,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감정이 머무는 시간과 공간을 음악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드뷔시는 조성, 시간 감각, 형식적 서사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음악의 기존 질서를 해체했다. 그는 전통적 조성 음악의 ‘해결’ 개념을 무력화하고, 온음계·5음음계·병행 화음·교회선법 등을 활용해 색채와 질감, 분위기로 음악을 설계했다. 드뷔시는 고정된 박자와 강약 구조에서 벗어나 템포 루바토, 박자 변화, 강약의 흐트러짐을 적극 사용했다. 그의 음악 안에서 시간은 더 이상 곧고 일정하게 흐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드뷔시 음악엔 선형적 서사가 없다. 도입–전개–재현의 고전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상과 질감의 변화 자체를 음악의 중심으로 삼았다.

<기쁨의 섬>에서는 온음계와 반복적 전조로 조성의 중심이 무너진다. 리듬과 전개 또한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을 만들며, 밝고 경쾌한 리듬조차 명확한 방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음악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을 자아낸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선율이 아닌, 음색과 악기 간의 균형이 중심이 된다. 주제의 전개가 아닌 소리의 공간적 배치를 통해 음악이 구성된다. 그 결과 청자는 음악을 ‘이야기’가 아닌 ‘풍경’처럼 경험하게 된다. 드뷔시의 음악이 수채화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가 사물의 정확한 윤곽보다 빛의 반사와 공기의 떨림을 포착하고자 했듯, 드뷔시는 선율의 외곽선을 또렷이 그리는 대신, 음색과 여운의 흐름을 따라 음악을 채워나갔다.

흥미롭게도 드뷔시가 음악의 구조를 바꾸던 바로 그 시기,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시간 개념을 다시 정의하고 있었다. <기쁨의 섬>이 발표된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내놓았다. 한 세기 가까이 절대적이라 여겨졌던 시간 개념이 이론적으로 무너진 순간이었다.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보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 않다. 공간 역시 고정된 배경이 아닌, 휘거나 수축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드뷔시의 음악은 그런 세계관을 예고하듯, 음악 안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해체했다. 음표 사이의 거리, 화성의 진행, 리듬의 흐름은 고정된 질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감각 속으로 들어간다. 더 이상 명확한 조성, 예측 가능한 형식, 일정한 시간의 질서에 기대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고전역학 체계를 해체하고 현대물리학의 새로운 질서를 제시했듯, 드뷔시는 낭만주의 시대의 문을 닫고 현대음악의 서문을 열었다.

드뷔시의 음악은 시작과 끝, 방향과 결말을 요구하지 않는다. 음악을 분석하기보다 그 안에 ‘머물기’를 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잠시 멍하니 있고 싶은 어느 오후,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아도 괜찮은 음악 드뷔시를 들어보자. 의미를 해석하는 대신 음악이 남긴 감각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스크린샷 2025-05-04 오후 10.08.07.png 드뷔시 자필 악보 – 〈기쁨의 섬〉 (L’ Isle joyeuse), 형식에서 자유롭고 색채감이 풍부한 후기 피아노 작품(프랑스국립도서관)


*2025년 5월 13일 '카이스트신문'에 게재된 글을 다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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