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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ti Nov 29. 2019

오빠, 우리 아이 낳지 말까.

딩크를 생각하는 이유


TV프로그램 중 연예인의 자녀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가장 싫어하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혼자 있을 때면 그 프로그램을 다시보기로 보기도 하고, 아이들 중 제일 좋아하는 윌리엄 해밍턴을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로 동영상을 찾아보기도 한다. 반면 남편은 아기 울음소리, 아이의 투정, 아이가 발생시키는 소음 등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다. 식당에서 소란스럽게 구는 아이를 부모가 제지시키지 않으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자리를 피해버린다.


남편은 미숙한 존재로의 아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딩크를 지향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딩크 제안을 먼저 한 것은 나였다. 심지어 프로포즈를 받기도 전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이 남자가 나에게 결혼 제안을 하기도 전에 “난 딩크족을 할거니 오빠는 그게 아니면 결혼얘기 꺼내지 마.” 라는 당당한 발언을 했을까.



‘제 먹을 밥그릇은 제가 갖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형편이 안좋아도 일단 낳고 나면 애들은 어떻게든 자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 자란 아이가 나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밥은 안 굶고 자랐다. 물론 IMF당시에 수제비만 일주일 먹었던 기억은 있다. 하지만 굶지는 않았으니 밥그릇은 가지고 태어났다고 봐야 하는 걸까. 중,고등학생 시절 내내 학원을 꾸준히 다니기 어려웠다. 길어야 두 세달이었고, 마지막은 항상 학원비가 한 달 밀린 뒤 끊는 식이었다. 그나마 초등생 시절 꽤 오래 다녔던 학원에 원비가 1년 이상 밀려있던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 정도로 원비가 밀린데다 책값조차도 안내는 학생을 무안 주며 쫓아냈을법도 한데, 내색 않고 똑같이 대해준 원장 선생님의 성함과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빠는 큰아빠와 함께 공장을 운영했다. 큰아버지는 공장에 직접 상주하시며 납품할 물건을 만드셨고 아버지는 영업 담당. 말 그대로 술상무였다. 회사 돈으로 여기 저기 영업이라는 명목 하에 좋은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일을 했다. 그런 아빠에게 큰아버지는 불만이 많았지만, 매일 공장에서 공구를 들고 일만 하시던 큰아빠는 나름 집안의 수재인 아빠에게 늘 지고 말았다. IMF를 지나며 공장은 문을 닫게 되었고, 한 지붕의 두 기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이후 남 밑에서 일 하는것을 극도로 꺼리던 아버지는 결국 집에 누워있는 것을 택했다. 술로 하루를 보냈고, 이에 지친 부인 마저 떠나게 되었다. 주렁주렁 달린 아이가 셋이라, 애들 밥이라도 맡길 요량으로 연로한 노모를 모시고 왔다. 그럼에도 늘 술을 마시며 누워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돈은 가끔 큰아버지에게 손 벌려 타 썼고, 슬하의 삼남매와 노모는 늘 그의 무기가 되었다. 고모들에게도 예외 없이 우리 삼 남매를 들먹이며 돈을 빌려댔고, 출가외인임에도 어린 삼 남매가 측은했던 고모들은 남편 몰래 숨겨뒀던 비상금을 아빠에게 부쳤다. 가끔 그마저도 빌리지 못하면 아빠는 그제서야 새벽에 막노동을 하러 갔다. 이런 아버지 곁에서 그렇게 그냥 자라졌다. ‘자라 졌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걸 알지만 정말 그냥 한살 한살 나이를 먹고 자라졌고 살아졌다. 대학 입학금도 큰고모의 도움이었고, 나머지 학비는 모두 대출을 받았으며 아직도 갚고 있다. 술과 함께 주사가 따라온 것은 어찌 보면 시간문제였고, 때문에 나는 스무살부터 독립해서 혼자 지냈다.


구구절절 어린시절의 어두운 얘기를 꺼내버렸다. 이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는 회색 기억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구해본 적은 없다. 그저 우리 삼 남매가 서로 보듬으며 가지고 가는 기억이다. 아빠에 대한 감정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불쑥불쑥 제각기 풍선처럼 올라오는 여러 감정들을 아직은 그저 마음대로 떠오르게 놔두고 있다. 아픔, 버리지 않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 원망, 미안함, 등등. 언젠간 여러 감정들 중 몇 개가 날아가 버린 뒤, 그 자리에 남은 감정들을 주워 담아 살아가면 될거라고 생각한다.



혼자 알아서 컸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다. 아빠도 나름의 노력을 했을테고 단지 딸린 식구보다 실패한 자신의 인생이 더 슬프고 중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도 그에 버금가는 나약한 사람이다. 세상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나만 비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나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때 자식에게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와 같은 변명을 하고 싶지가 않다. 아이가 나와 같은 감정들을 느끼고 자라날까봐, 내가 내 부모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두렵고 무서워서 나는 아예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번식의 욕구는 인간과 더불어 모든 생명체가 가지는 강렬한 본능이다. 자신을 재생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그 본능을 누르는 것은 아주 비참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는 사회다. 언젠가 내 스스로의 인생이 아주 마음에 드는 날이 온다면 재고해 볼 수 있겠지만, 밥만 먹고 자란 아이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큰 흉이 남았다. 말랑한, 갓 바른 시멘트에 진 흉은 굳은 뒤 더욱 선명하게 남는다. 누구도 바로 다듬어주지 않았고, 이제서야 제 스스로 그 위에 덧바르고 있다.


아주 만일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칭얼거림에 이골이 날 때나 아이가 짐처럼 느껴질 때마다 이 글을 꺼내 읽고 싶다. 이 모든 번잡한 감정들을 타개하고 용기내어 만났을 그 소중한 아이가 당연하게 느껴질때마다, 애써 외면했던 예전의 회색감정들을 꺼내어 반성하고 다짐하는 그런 성숙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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