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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ti Dec 07. 2019

가족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어디서 이런게 왔을까?


얼마 전 남편과 고깃집에서 반주를 하고 집 근처 단골 노래방을 찾았다.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는 술 한 잔 걸치면 그렇게 흥이 돋아서,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필수 코스로 노래방을 들렀다가 집에 가곤 한다. 보통 주말인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저녁에 가는데, 주중에 남동생이라도 놀러 와 함께 한 잔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노래방이 당긴다(그제 갔던 것과는 관계없이). 이런 이유로 주 2회 방문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따라오는 비용 부담이 꽤 크다. 그날도 나는 ‘오늘은 참아요 오빠.’를 외치고, 남편은 ‘오늘만요, 딱 오늘만!’을 외치며 번쩍거리는 노래방 간판 앞에서 둘이 실랑이를 했더랬다. 결국 나는 생후 450개월쯤 된 이의 노련한 애교에 지고 말았다.     


만일 내가- 그대보다 먼저 가- 그곳에서 사람들 나를 맞으면-

막상 노래방에 들어서니 내가 더 들떠서 신나게 부르던 와중에, 남편이 노래 부르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귀에 속삭였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사람이 왔을까. 어떻게 나한테.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어릴 적 아빠와 대치하던 중에 들었던 말이었다. 물론 뉘앙스는 아주 달랐다. 수입이 없던 아빠는, 술을 많이 마셨거나 갑작스런 패배감이 자신을 덮칠 때마다 자식들의 언행이나 외출을 제한하며 본인의 권위를 확인했다.

주말 낮에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아빠의 그 날 기분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저녁 늦게 오는 것도 아닌데, 내가 모은 용돈으로 영화 한 편 보려고 예매까지 다 해놨는데,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그때마다 술 취한 아빠는 이유는 묻지 말라고 했다. 그냥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밖이 그렇게 좋으면 나가 살아.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내 딴에는 큰 용기를 낸 거였다.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세요. 대체 영화 보러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좀 말해보라고요. 아빠 이렇게 누워서 술 먹는 거 보기 싫어서라도 숨 좀 쉬러 나가고 싶다고요!    


그때 아빠 입에서 나왔던 말

어디서 이런 게 나왔을까. 너 같은 게 어디서.         



   

세상 빛을 보게 한 사람이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도 없었던 나를 아빠가 멋대로 낳아 놓고서는 내게 ‘너 같은 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저 말이 아마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가족’에 많은 의미부여를 하게 된 이유인 것 같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낳아지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들과 가족이 되며 그들과 평생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마치 문구점 앞에서 100원 주고 하는 뽑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은 아이들은 돈도 많고 자상한 부모님한테 뿅! 나처럼 운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은 이혼가정에 매일 술주정하는 것도 모자라 내 존재마저 부정하는 사람 밑으로 뿅.        



운도 지지리 없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고, 내 인생 그냥 이렇게 시시하게 가는구나. 체념하고 살기를 약 30년.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가족들로 내 일상을 채워가고 있다.

매일 밤 나를 울며 잠들게 만들었던 가족이 아닌, 내 존재만으로도 고마워하는 가족과 함께 잠든다.

밤 새 술 마시다 또 일을 못가, 기름보일러에 기름이 떨어져(내가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름보일러를 때는 집에 살았다) 추위에 떨며 잠에 들게 만드는 가족이 아닌,

내가 자다가 조금이라도 추워하면 벌떡 일어나 두꺼운 양말을 가져다 신겨주는. 그런 남편과 함께 산다.   




     

지금 처한 현실이 정말 끝이 안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수백 번도 더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집안의 문제로 이런 건 사치라고 생각하며 결혼이나 꿈을 접고 싶을 수도 있다.

당장 내일이 오는 게 싫어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당장 내일 학교 갈 차비가 없어 1시간 거리를 걸어갔던 대학시절의 내가

그냥 그대로 학교를 포기해버렸다면,

알콜중독자 아빠가 부끄러워

지금의 남편에게 말도 못 꺼내고 그냥 결혼을 포기해버렸다면,

그 가난한 와중에 유기견이었던 우리 강아지를 데려오지 않고 외면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내가 선택한 가족’들로 꾸려진 가정을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선택된 가족’들로 인해 평생을 좌절만 하며 살았을 거다.    


        

나를 태어나게 해 주었다고 해서, 혹은 가족으로 함께 살았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현실이 벅차고, 원망스럽고, 힘들더라도 나 자신의 인생만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가족에 대한 문제는 가장 우선인 ‘나’ 다음에 고민할 문제다.

남들에게 매정하다고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맞더라도

나만큼은 나를 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나를 위해 한 작은 선택들이 모여 인생길의 방향을 만든다.

그 길 끝에는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서 있을 수도, 혹은 꿈꾸던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힘들어도 주어진 오늘을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족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주 울면서 잠드는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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