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모으는 시간

기다림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드는 것들

by isol

생각보다 장기적인 호흡이 필요하다. 다시 시작하기에 앞서 급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기는 쉽지 않지만, 무너졌던 시점을 다시 마주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에 나는 지금 급하면 또다시 무너진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다.


윙을 달기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부서장의 조언. 그는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해서도 내가 제안한 것을 거부하며 지금은 다른 것을 하지 말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답을 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납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이내 다시 무기력해지지 않을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비행. 지금까지 배웠던 것과 유사하긴 하지만 전혀 다른, 내가 경험하지 않은 비행을 준비하기 위해 펼친 책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때가 다시 떠올랐다. 비행뿐만이 아니라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공부량에 몰입했던 내 모습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뜨거웠고 열심히 준비하고 대비했었다.


새로 들어온 큰 조직에서 가로막힌 나의 작은 비행계획. 그러나, 나는 그 조직을 미워하지 않는다. 내가 떠난 조직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날 놓고 온 지갑을 보고 연락을 주었던 분이 떠오른다. 지갑 안에는 신분증, 건설 자격증, 군번줄, 그리고 천 원짜리 몇 장. 이 중 어떤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려는 나를 반겨주듯 정성스러운 상자 안에 내 지갑을 담아 택배로 보내주었다.


큰 조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소속감, 정체성, 안정감을 준다. 변하지 않는 조직이지만 이들은 각자 자신의 사명감, 책임감, 동료의식 등을 바탕으로 서로를 챙기고 보듬어 준다. 나는 조직을 떠나기 전, 잃어버렸던 내 모든 정체성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금은 다시 하나하나씩 되찾아가며 잃어버린 나의 조각들을 모아가고 있으니 모든 것이 감사하다.


아버지, 군인, 비행사, 조종사. 이토록 많은 나를 한꺼번에 잃어버렸을 때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깊게 잠식되었다. 나로서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면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다 결국 생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을 통해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전과 다르게 인내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기다릴 수 있다. 당장의 오늘을 보면 내일, 모레, 몇 년 후의 미래는 어둑할지라도, 좀 더 긴 미래로 긴 호흡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숨통이 트일지도 모른다.


큰 조직 안에서의 나도 나이지만, 개인으로서의 나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중 가장 잃고 싶지 않은 나는 비행을 하며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나다. 그러한 나를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에게 나는 어떠한 나로 존재해야 할지 고민하며 잠을 청한다. 결국은 그에게 필요한 내가 되지만, 그러한 나는 진정으로 원하는 내가 되고 싶을 뿐이다.


해가 길어졌다. 하늘을 오래 즐길 수 있는 날이 다가온다. 곧 겨울을 지나면 또다시 꿈꾸는 날을 기다려 본다.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