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 표 CIA 스파이 영화는?

영화 '번 애프터 리딩'

by 무덤덤

FBI에 비해 살짝 소외됐던 CIA가 영화 '본 시리즈'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무시무시한 내공을 보여준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형제 감독이 오랜만에 스파이물을 만들었는데 그 배경도 CIA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 단골 감독으로서 이제는 거장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코엔 형제가 만드는 CIA 스파이 영화라? '본 시리즈'를 능가할 또 다른 역작을 기대해 봄직하다. 출연자들의 호화로운 면면을 살피면 그 기대감은 한껏 더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다 괜한 기대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코엔 형제의 그 심오한 작품세계를 붙잡아 보느라 나름 분주했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였다. 결과적으로 영화 '번 애프터 리딩'은 참으로 공허한 스파이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가 흥미롭지 않다는 것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코엔 형제 초기의 괴짜스러운 면모가 풍기니 재미있는 건 물론이요, 반갑기까지 하다.

술 버릇이 나쁘다는 이유로 CIA에서 축출당한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는 수 십 년 동안 본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써내서 CIA에 한 방 먹일 태세다. 이를 위해 나름 열심히 마련한 자료가 공교롭게도 린다(프란시스 맥도맨드)와 채드(브래드 피트)가 일하는 스포츠 센터로 흘러 들어가고, 린다와 채드는 이 자료를 가지고 모종의 거래를 시도하려고 한다. 천진난만한 채드는 '스파이 놀이' 자체에 신이 나 있는 상태고 린다는 전신 성형 비용을 마련할 호재이기 때문이다.

한편 린다와 좋은 만남을 갖고 있는 해리(조지 클루니)는 오스본의 아내 케이티(틸다 스윈튼)와도 바람이 나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고 해리에게 올인한 케이티는 남편 오스본에게 이혼을 통보한 상태다.


네 명의 등장 인물들은 아주 세속적이며 일상적인 이유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떤 거대한 음모가 있다거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등장 인물들에게 여유와 포스가 넘치는 영웅적인 면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순간의 치기, 욱하는 성질, 사소한 의심, 소박한 희망 등이 쌓이고 쌓이면 이 장난 같은 '스파이 놀이'는 급기야 매우 유감스러운 사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속 상황들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아주 일반적이고 사소하다는 것인데 재미있는 건, 이 보통 사람들의 새로울 것 없는 삶 속에서 벌어지는 스파이 놀이가 꽤 흥미진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코엔 형제의 이야기를 푸는 솜씨에 기인한 바가 크다.


'번 애프터 리딩'의 이야기는 제자리에서 360도를 회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황은 모두 제자리에 안전하게 세팅되지만 그 원 한 바퀴를 도는 도중에 관객들은 참 많은 에피소드와 다양한 감정들을 만나고 만끽하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코엔 형제만이 지닌 강력한 콘텐츠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장난 같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뜻밖에 느닷없는 비극을 맞닥뜨리게 하는 독한 유머도 코엔 형제표 코미디에 어김없이 등장해서 색다른 유희를 제공한다.


그토록 쟁쟁한 주연 배우들을 제치고, 코엔 형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갖게 되는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이 형제만의 독자적인 것이다. (2009년 3월 작성)


제목 :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 2008, 미국/영국/프랑스)

OTT :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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