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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거짓말

by 박인식 Feb 16. 2025

노한동

사이드웨이

2024년 12월 26일


사이드웨이에서 관심을 둘 만한 책을 펴냈다는 이야기는 진즉에 들었다. 한동안 종이책을 읽을 수 없는 형편이라 전자책을 사 모으는 중이어서 전자책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저자가 경제방송에 나와 책 이야기 나누는 걸 보게 되었다. 평생 해온 일의 성격상 공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을 늘 만나야 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의 실상에 익숙했고, 그러면서 궁금증도 불만도 많았다. 저자가 공직을 그만둔 이유도 그 어디쯤 아닐까 생각했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적지 않게 공감하고 아울러 그만큼의 궁금증도 일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직의 꽃인 고위 공무원에 오를 가능성을 스스로 걷어차고 나온 이의 생각을 방송에 오롯이 담아내기엔 짧은 시간이라 더 이상 전자책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국내에서 일할 때 만난 이들은 대개 기술직 공무원이었고, 순환보직으로 자리를 옮겨도 전혀 엉뚱한 일을 맡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경력만큼의 능력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만난 공무원들은 전문성보다는 진급을 위한 경로나 근속에 대한 보상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보였다. 물론 편견일 수 있다. 하지만 길어도 삼 년이 넘지 않은 경력 한 번으로 전문성을 기대하는 게 무리한 일이라는 생각이 뭐 그리 잘못되었을까.


해외 근무할 때 현지 공관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대사관 모임에서 세금 낸 게 아깝지 않더라고 감사의 말을 전한 일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공관에 현지어를 할 줄 외교관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전혀 없었던 때가 더 많았다.


공직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업무가 방대하지만 중앙 부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적은 인원으로 그 많은 일을 감당한다. 거기에 순환보직으로 실무자는 3년, 과장급은 2년에 자리를 옮기는 게 원칙이고 실제로는 그보다 짧다니 거기서 무슨 전문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저자는 순환보직을 탓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형편에도 국정이 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더 놀랍다. 문득 그것이 그들이 뛰어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없어도 늘 그만큼은 돌아가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런데도 저자는 순환보직이 결원을 채우기 편리하고, 당사자로서도 보직을 순환하며 승진할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순환보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제도로 바꾸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직위를 사유화하는 이들에 대한 염려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관리자급 공무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 분야에 오래 근무할 수 있도록 허용하거나 외부 전문가에게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저자 역시 같은 주장을 펼친다. 현행 제도에도 특정 직위는 필수 보직 기간을 4년 이상으로 늘린 전문직위제가 있는데도 정작 공무원 당사자들은 여러 편법으로 이를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상반된 상황을 소개한다. 물론 개인의 선호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붙었는데, 글의 흐름으로 보면 개인의 선택에 맡겨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저자 말대로 의무적으로라도 외부 전문가에 문호를 개방해서 정부-의회-민간-학계를 넘나들며 다방면의 경력을 쌓도록 해야 하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이 저자가 설명한 ‘공무원 신분을 보장한 헌법과 법률’에 어긋난 건 아닐까? 자리가 있어야 사람을 받을 텐데, 있는 사람은 내보내지 않고 받기만 하겠다는 말이니.


저자는 순환보직에 이어 연공서열 또한 공직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연공서열을 없애는 게 오히려 공직사회 전체에 손해라고 말한다. 성과자는 대우받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나 경쟁을 회피하는 이들은 오히려 손에서 일을 놓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 걱정하는 것은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공직사회는 소수의 혁신가보다는 다수의 성실한 공무원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인데, 상황은 동의할 수 있지만 그래서 연공서열을 없애면 대다수 공무원이 드러누울 수밖에 없다는 진단은 매우 놀랍다.


책을 읽어가며 이런 면이 불편했다. 왜 공직사회는 민간기업과 달라야 하고, 소수의 혁신가 보다 다수의 성실한 공무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공공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이유로 신분이 보장되는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일까?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면 혁신이나 경쟁에서 예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마 공무원의 헌신을 염두에 둔 말이지 싶은데, 민간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 눈에 ‘평생 고용’이 헌신과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혜택으로 비치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인가?


저자가 공무원 업무 상당수가 가짜 노동이라고 비판한 대표적인 사례로 ‘한 장짜리 보고서’를 들고 있다. 방송을 보면서 이 내용이 가장 궁금했다. 업무와 관련해 읽은 것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이 패트릭 라일리의 <The One Page Proposal>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인상적으로 읽었고, 업무에 적용해 그 이상 효과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The One Page Proposal>과 저자가 생각하는 ‘한 장짜리 보고서’는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게 가짜 노동이고 그것이 공직사회를 병들게 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이었을까?


요약하자면 내게 한 장짜리 보고서는 ‘보기 좋은 것’이었고 저자에게는 ‘보기만 좋은 것’이었다. 형식에 치우치기 때문에 핵심 내용에 신경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조식 서술 방법이 육하원칙에 따라 사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서도 그런 방식은 단발적인 정보를 전달하기는 좋을지 몰라도 복잡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다. 한 장으로도 문제의 핵심을 전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장짜리 보고서’를 아무에게나 제출하는 건 아니다. 결국 대상은 의사 결정권자인데, 그런 사람이 사안의 세밀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게 문제의 핵심만 전달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이 얼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 물론 한 장이라는 분량에 문제점과 원인과 해결방안을 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그러다 보면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게 되고, 엄청나게 복잡한 현실이 단순한 몇 가지 맥락으로 치환된다는 저자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뒷장에서 직업 관료는 간결한 보고서 안에서도 문제를 이해하고 다층적인 함의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보고받는 직업 관료는 간결한 보고서에서 다층적인 함의를 찾을 수 있는데, 보고하는 직업 관료는 왜 간결한 보고서에 다층적인 함의를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그것이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인 건 아닐까? 깔끔하게 작성하는 데 신경 쓰느라 정작 내용에 충실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내게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물론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저자는 정치적인 외풍이 직업 관료가 본래 가지고 있던 유능함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말한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할 것이다.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이 정파적 이익에 따라 정책을 좌우하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그런 상황에서 직업 관료가 유능함을 발휘하는 게 오히려 기적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저자는 실제로 사무관이 하는 일을 기준으로 정치권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안은 구체적 업무 열 개 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열에 아홉은 외풍과 무관한 셈인데, 그것으로 직업 관료의 유능함이 가려진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


이런 상황이니 예산 편성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 자체가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각 부처의 예산을 기재부에서 편성과 집행 과정 모두 그토록 세세하게 챙기는 줄은 몰랐다. 민간기업에서도 사업별 부서별 예산은 무섭도록 따지지만, 총액 범위를 넘지 않는다면 집행 과정에서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 물론 최종적인 예산 운영에 대한 책임은 오히려 공직사회보다 더 준엄하게 묻는다. 저자는 이와 같은 ‘총액배분자율편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각 부처에 대한 기재부의 불신 때문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심각한 착각이라고 질타한다.


나도 저자의 주장에 십분 동의한다. 사회는 최소한의 신뢰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통신호가 교통질서를 지키게 만드는 건 시스템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교통질서를 따를 거라는 최소한의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듯 말이다. 물론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는 시민이 있고, 그래서 그런 시민에게 범칙금이라는 재산상 손해를 지운다. 기재부가 각 부처를 신뢰하지 못해서 예산 편성과 집행을 하나하나 통제한다는 것은 내게는 마치 범칙금 때문에 시민들이 교통질서를 지킨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질타 또한 “각 부처에서는 지원 사업 규모를 효율화해 예산을 줄이면 오히려 질타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예산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앞선 설명과 부딪친다.


이렇게 보면 저자의 설명 하나하나가 일관성보다는 모순에 가까워 보이고, 열거한 문제에 대해서도 딱히 해결책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 물론 저자가 그걸 모르고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공직사회의 문제가 엉켜있어 좀처럼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지 싶다.


저자는 책 후반부에서 직업 관료가 유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신화라면서 자신은 그 신화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10년 넘게 일하는 동안 그런 경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그래도 고시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이 아닌가. 저자 말대로라면 당장 국정이 붕괴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만, 그런 질타가 어제오늘에 와서 새롭게 생겨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국정이 나름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최소한의 선의와 등용된 인재로서의 유능함’을 지켜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그렇게 단적인 표현으로 질타하는 저자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부디 저자의 이런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전달되어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반 발짝이라도 나아지는 공직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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