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김명남은 번역투의 글이 의미가 있다면서, 원문과 번역문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으며 또한 그런 게 우리 말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해도 전혀 다른 말이고, 그런 전혀 다른 말을 만든 게 번역투 문장의 힘이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마치 진성 한국어가 있는 양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가 장강명은 우리말에는 없는 과거완료형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제는 과거완료형이 갖는 의미를 누구나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혹 70~80년대 영상을 보면 당시 서울 사람들의 말투라는 것이 지금 들으면 생경하기 짝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마치 진성 한국어가 있는 양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번역가의 말이나 과거완료형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는 소설가의 말은 틀렸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가능한 그런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하고, 앞으로도 글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마치 손에 잡힌 물집을 보는 것 같은 마음이다. 가라앉혀야 할 걸 알면서도 굳이 터트리고 싶은. 물론 그런 글이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굳이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변화를 싫어하는 편이다. 한 직장을 사십 년 넘게 다니고, 머리를 한 사람에게 십오 년 넘게 깎았다. 빠르게 바뀌고 바뀐 데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도태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그렇게 해서 아낀 에너지를 꼭 써야 할 곳에 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