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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2025.05.02 (금)

by 박인식

서울서 나고 자란 내게 시내라면 광화문이나 보신각 어디쯤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곳까지는 지하철로 서너 정거장, 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서울에 돌아와서 한동안 그 동네에 있는 정독도서관까지 걸어 다녔을 만큼 가까우니 지척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곳에 이사 온 게 90년이었으니 벌써 35년이 지났다. 시내가 지척인 이곳은 이사 올 당시만 해도 ‘답동’이라고 했다. 오래 살던 분들은 ‘논골’이라고 부르던 (논골=畓洞) 이곳은 앞에는 스위스그랜드호텔이 막고 있고 뒤로는 백련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지나다니면서도 이 동네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설명을 하면 그제야 홍은동에 그런 동네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지금도 조용하기 짝이 없고, 공기도 맑은 동네이다. 시내답지 않게.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순환로가 생겼다. 그 길로 출퇴근하면서 안산 자락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십 년 넘게 보면서도 그곳에 한 번을 가보지 못했다. 그래도 벚꽃 필 때가 되면 세상없어도 올해는 가보리라 결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나무도 풀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는 사막 한복판에 살면서 서울 곳곳에 둘레길이며 개천길이 생겼다는 소식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중 압권이 안산자락길이었다. 집 앞에 있는, 봄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매번 가 보리라 마음먹었던, 바로 그곳에 어디 못지않은 숲길이 생긴 것이다.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당연히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그 길이었다. 그때 이미 홍제천이 말끔하게 정비되고 폭포도 들어섰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치고 볼 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내 상식을 깰 만큼 홍제폭포는 도심 한복판에서 허파처럼 주변에 산소를 불어 넣고 있었다. 안산자락길 올라가는 길 중간쯤에 들어선 공원도 아름다웠고, 흉물처럼 보이던 고가도로가 자칫 황량해 보일 수 있는 인공폭포 앞에 그늘을 드리워 오히려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안산자락길 시작하고 10분쯤 걸어 올라가면 마주치는 메타세쿼이아 숲도 장관이었다.


모처럼 긴 연휴를 맞았다. 몇 차례 고비를 맞았던 일이 조금씩 풀려나가서 편안한 마음으로 연휴를 만끽하고 있다. 어제 천둥 번개까지 치던 날씨가 아침에 일어나니 화창하게 개었다. 그 덕에 나뭇잎은 더 싱싱해졌고. 아내와 안산자락길을 걸었다. 두 시간 반 걷고, 홍제폭포 앞 데크에서 커피 한잔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나니 날아갈 것 같다.


참 좋은 동네이다. 이 동네는 한번 들어오면 어지간해서는 이사해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 수십 년씩 산다. 시내에서 십 분 거리인 홍제 지하철역 주변엔 병원이 수십 곳이고, 시장에 슈퍼가 곳곳에 들어서 있을 뿐 아니라 물가도 싼 편이어서 우리 같은 노인 내외가 생활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수십 년씩 사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곳은 도무지 집값이 오를 줄을 모르고, 그래서 이곳에 살던 사람은 그 돈 가지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집값 비싸서 쩔쩔매는 이들은 보면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시내까지 지하철 십 분이면 되고, 차를 가지고 있으면 내부순환로 타고 복잡한 시내 피해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안산자락길에 홍제폭포에 홍제천길 따라 걷다 보면 한강도 지척인데. 왜 이렇게 편안하고 편리한 동네를 마다하고 딴 곳에서 헤매고 있는지.


서울서 넉넉하지 않은 돈으로 집 구하는 분들은 참고하시라. 비싸도 평당 2천이 안 되는 이 동네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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