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하는 약이 있다. 그런 약이 서너 가지 되는데, 건강을 장담하던 나도 꽤 오래전부터 그중 두 가지나 먹고 있다.
병원에서 한 번에 처방할 수 있는 한계가 6개월분이다. 최소한 6개월에 한 번은 의사를 만나 경과를 확인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사실 만나봐야 특별한 일도 없다. 그저 혈압 재고 약은 잘 먹는지 묻는 게 전부이다. 가끔 맥박도 재기는 한다. 또 한 곳에서는 소변보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묻는 게 전부이고. 병을 다루는 사람들이니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안색을 살핀다던가, 질환과 관련한 증상을 확인할 수는 있겠다. 나는 워낙 의사가 말하는 걸 법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이다. 세상없어도 약은 처방해준 대로 꼬박 챙겨 먹는다. 의사가 오라는 대로 꼬박 병원에 간다. 매달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의사에게 양해를 구하지만, 그래도 두 달은 넘기지 않는다.
우리 건강보험은 가입자에게는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제도이다.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6개월 이상 외국에 나가 있을 경우이다. 처방은 환자가 받는 것이 원칙이다. 간혹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면 양해를 얻어 대리처방을 받을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도 환자가 국내에 있을 때 한한다. 요즘은 출입국 상황을 클릭 한 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어서 환자가 출국했는데 진료나 처방을 받으면 바로 병원에 책임을 묻는다. 그러니 병원에서 해주고 싶어도 처방을 내줄 수 없다.
그것이 단지 보험수가의 문제라면 억울해도 돈을 조금 더 내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먹는 약은 처방이 없으면 약국에서 아예 약을 내주지 않는다. 처방전 없이 처방 대상 의약품을 판매하면 약사법 위반으로 간주해 처벌 대상이 된단다. 그래서 그런 약국을 신고하라는 포스터를 본 일도 있다. 약의 오남용을 막으려는 정부의 선의에서 출발한 일이니 정책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주재원으로 근무했을 때도 그랬고, 당장 이달 말에 출국해야 하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약을 안 먹을 수는 없고 출국은 해야 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었을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약을 안 먹었을까. 어떻게 먹었을까? 말이 좋아 편법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불법으로 약을 구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의료보험료는 귀신같이 떼어가면서 출국했다는 이유로 장기간 복용하는 약을 처방해주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일까? 더구나 처방 대상 약품은 처방 없이 살 수도 없게 만들어 놓고.
하도 답답해 건강보험공단에 전화하니 이런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해하고요, 우리도 그게 잘못된 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법이 그러니 저희도 방법이 없어요.”
덕분에 나는 심오한 철학적 질문에 직면하였다.
아! 법이란 무엇인가? 죽이자는 걸까, 살리자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