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한겨레엔
2024년 8월 31일
바빴다. 물리적으로 바빴고 심리적으로는 더 바빴다. 평생 해외 원전은 해보지 못하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천운으로 마지막 순간에 편승할 수 있었고, 덕분에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은 해소되었으나 이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아가 이것을 새로운 사업모델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다른 압박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보름이 되도록 책 한 권을 읽지 못했다. 어제야 비로소 체코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 읽지 못한 이 책을 꺼내 읽었다.
꽤 오래전에 페친이 된 이가 있다. 파주 어딘가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데, 사실 이 시대에 그것도 서울 근교에서 공동체 생활이라는 게 가능할까 싶어 조금은 신기한 눈으로 지켜봐 왔다. 파주 교하에 있는 협동조합 서점 ‘쩜오책방’과 지역연구소인 ‘소셜랩 접경지대’가 그의 활동무대라고 했다. 작년 이맘때쯤 그가 낸 책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더란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월요일 운동장에서 열리는 조회를 마치고 나면 밴드부 연주에 맞춰 퇴장하곤 했다. 그때 밴드부가 ‘쌍두의 독수리’, ‘지상 최대의 작전’과 더불어 자주 연주했던 곡이 바로 ‘콰이강의 다리’였다. 이 책을 읽으니 그 곡이 ‘보기 대령 행진곡’이라고 했다. 새롭게 안 사실이다. 물론 영화도 보았다. 그러고 보면 당시 영화 중에 명화가 참 많았다. 그리고 그 영화는 모두 학교에서 단체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 조선인이 있었다고 하니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이 전쟁 물자 운반을 위해 태국과 미얀마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는데 동원한 영국군 포로들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어코 그 다리를 완성하지만, 완성한 그날 영국 특공대가 다리를 폭파한다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징용으로, 징병으로, 정신대로 수많은 조선인을 끌고 갔으니 그들이 동남아에 있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순전히 그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고 그 책에 실린 근현대사 18꼭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제목에 낚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서양의 근현대사를 종횡으로 넘나들고 있다.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궁금증이 여럿 생겼다. 이 다양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어떻게 구하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교하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활동과 이런 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풀리지 않았다.
저자는 이 글에서 2011년 콰이강의 다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영국인이 회고록을 출간했다며 그의 글을 인용한다. “우리는 제복도 입지 않았고, 벌거벗은 맨발의 노예였다. 우리는 존엄을 읽은 지 오래였고, 더 빨리 일한다고 존엄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영화가 사실을 바탕에 두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말이겠다. 드문 일은 아니니. 하지만 저자는 이 과정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 조선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42년 일본은 조선과 대만에서 포로감시원 역할의 군에 소속한 민간인(군무원)을 모집했다. 종전 후 포로감시원 중 일부가 전범으로 분류됐다. 전범 재판을 받은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포로감시원이었으며 사형된 조선인 23명 중 14명이 포로감시원이었다.”
그들은 피해자이자 조선인임에도 전범으로 계속 형을 받았지만 군인연금 지급과 원호법 보상 대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유사한 사례가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그게 꼭 그때 국한해 일어난 일도 아니고, 그곳에서만 일어났던 일도 아니다.
나는 재미에 이끌려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손목인 <아내의 노래>, 나혜석의 세계 일주, 그리고 KBS <첫사랑>에서 출발해 월남전, 한국전쟁 양공주, 일본 전시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사실을 씨줄 날줄로 엮어낸 저자의 솜씨는 여느 입담꾼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이 책 곳곳에 담아놓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은연중에 독자에게 문제를 일깨우고 있다. 저자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 대목이다.
“2017년 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에게 경의를 표하자 베트남 외교부가 항의했다. 전몰자를 추념하는 건 국민 국가의 당연한 권리라며 한국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거나 공물을 바치면 한국 정부와 여론은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 논리와 똑같은 논리를 한국 정부와 사람들이 내세웠다.”
명시적으로 표현한 일은 없지만, 나 역시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논리로 남을 비난하기도 했고
“조선 왕조의 몰락이 명확해진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꿈꾼다는 것은 조선 왕조의 부활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일본을 쫓아내고 군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조선 왕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드는 문제였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지 궁금했다. 오백 년이나 내려온 체제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다면 그만한 계기가 있어야 했을 텐데.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해 속 시원한 답을 접해보지 못했다. 저자라면 이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았을까?
“독일인 대부분이 수용소에서 벌어진 잔인한 일을 세세히 알지 못한 건 사실이다. 수백만 명을 조직적이고 기계적으로 학살한 것, 이 모든 것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사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런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독일인 대부분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나치에 열광하고 유대인과 타민족을 증오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은 보이지 않는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독일의 과거사 청산이 지닌 특징이었다고 지적한다. 덕분에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고 한 일은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가 곳곳에 담아놓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누구인지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처럼 방대한 지식이 그의 전공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생각보다 그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얼마 전 퇴근길에 만나 함께 소주 한 잔 기울이던 정재권 선생께서 그를 인터뷰한 기사가 그중 저자를 잘 소개하는 글로 손꼽을 만하다.
그는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우리 안의 친일>,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를 썼는데, 모두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이지만 그 중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가 가장 관심이 갔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제목만으로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짐작했던 대로 그는 그 책에서 “글을 쓸 때면 정의를 찾게 된다. 그렇게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내 삶이 글처럼 정의롭지 않다. 그 격차를 부끄럽게 고백하되, 그 사이 긴장과 모순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자는 86세대가 권력욕이 컸던 집단이라던가 권력을 잡고서 타락했다는 식의 비판은 적절한 비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도 왜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그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검색해 보니 당장 볼 수 있는 전자책은 공교롭게도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하나뿐이다. 일단 그것부터 읽어야겠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저자의 나이를 짐작할 만한 것이 보이질 않는다. 교하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한다니 불평등에 관한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도 어렵지는 않겠다. <우리 안의 친일>에서 친일은 재료일 뿐 주제는 아니라고 하니 그것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