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페미니즘의 도전

by 박인식

정희진

교양인

2005년 11월 7일 초판

2023년 2월 20일 개정판


오래전에 차별금지법을 깊이 살펴보고 열두 편으로 정리한 글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지은 일이 있다.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평생 ‘가진 자’의 논리로 살아왔다. 그 논리로 약자를 비판하고, 때로는 혐오하기도 했으며, 그들을 차별하는 일에 동조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고서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깨달았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 책에서 이런 내 착각의 실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지적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이니 그렇다. 그는 이어서 그런 상황이 여성을 오늘과 같은 차별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지적한다.


“근대 이후 여성은 가족을 대표하고 남성은 사회를 대표하게 되었다. 여성은 모성을 담당해 노동자 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성의 가사 노동은 비가시화되고 유휴 노동력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반면 남성 가장은 사회에 대한 가족의 이해를 대변하게 되었고, 노동자 모델을 남성으로 전제하여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임금 차별을 정당화하게 되었다. 남성이 가족을 부양한다는 전제 아래 고용, 임금, 승진, 직업 훈련 등에서 남성 노동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대단히 어렵다. ... 공사 분리제도를 통해 여성은 남성과 다른 형태로 국가, 사회와 관계를 맺게 된다. 공적 영역은 남성만을 주체로 세우기 때문에 여성이 공적 영역과 관계를 맺거나 경찰, 법 같은 공적 자원을 이용하려면 남편을 매개할 때 가능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보다는 누구의 아내일 때 정상성을 획득하고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여성에게 사회적 시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아내, 어머니 등 성 역할 정체성이 우선하며, 여성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은 성 역할로 환원된다.”


대체로 동의하나 군데군데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도 그럴 게 이십 년 전에 처음 발간된 책이니 딱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개선된 셈이다. 하지만 개선된 것은 지엽에 지나지 않고 저자의 서술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아직도 견고해 보인다.


장년의 시간을 십 년 넘게 보낸 사우디에서는 내가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모든 여성은 높은 담으로 가려진 집 안에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의 보호 아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그들은 그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남성만의 시각은 아니었다. 나이 든 아주머니 오히려 여성에 대한 그런 대우를 부추기고 강화했다.


뜬금없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우디 경험이 소환된 건 다음 두 문장 때문이었다.


“고부 갈등은 여성과 여성의 갈등이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여성의 관점에서 비롯된 정체성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맺고 있는 힘의 관계를 설명할 뿐이다. 어머니의 권력은 결국 아들의 권력에서 나온다. 어머니의 행복한 삶은 아들을 통해서, 정확히 말하면 아들의 아내의 노동을 통해서, 보장된다.”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인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 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한 남성들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읽기까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성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당하는 차별을 토로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따지자면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할 말이 있을 것인데. 게다가 어쩌다 관련 기사라도 읽다 보면 옳고 그름도 선악도 구분할 수 없는 진흙탕 개싸움이었다. 마치 정치에 관심을 끄고 사는 것처럼 관심 둘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연한 기회에 저자가 쓴 <아주 친밀한 폭력>을 읽었다.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가까운 친구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주장을 펼치는지 듣게 되었고, 저자의 초기 글을 읽어보라는 권고도 받았다.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저자가 말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수용하려면 적지 않은 부담을 감당해야겠지만, 그래야 하는 일이고 그 역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의 다음 지적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여성주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 여성주의는 편파적이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가 자신의 사고 역시 편파적이며 더구나 강자의 경험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 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 여성 운동은 사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 역사, 정치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이제까지 여성 문제는 정치 밖에 존재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등 기존 정치 전선 자체가 남성의 관심사에 의해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를, 역사를, 정치를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이고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자 스스로 이런 문제를 제기해놓고 정작 그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언급했는데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권한 친구는 저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주장이 많이 바뀌었다면서 저자의 후기 저술을 경계하라고 귀띔했다. 저자를 처음 만난 <아주 친밀한 폭력>도 그랬고 이 책도 언뜻 과격해 보이나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지론과 주장은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후기 저술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요 며칠 이 책의 주제와 직접 맞닿아 있는 사건 때문에 꽤나 소란스럽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가해자를 두둔하기 위해 동원하는 논리가 하나 있다. 바로 가해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논리를 들을 때마다 석연치는 않았는데, 저자는 그에 대해 아주 직설적으로 그 논리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지적한다.


“물론 성폭력 가해자도 인권은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인권은 성폭력 가해 용의자가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피해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의 권력은 아니다. 광주 학살의 발포 명령자와 같은 가해자 인권 역시 재판과정에서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지, 그들이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인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이처럼 인권 개념의 보편성은 사회적 약자에게 적용될 때만 인권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표현의 자유도 아무 때나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 규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저항일 때만 권리로 존중될 수 있다.”


XL (1).jpe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의도하지 않은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