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배
김영사
2025년 8월 28일
해외에 사는 동안 한국에 올 때마다 제일 먼저 책방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전자책이 드물었고 읽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종이책을 보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책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다. 책방을 자주 찾는 이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책이 얼마나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신간은 또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모른다. 홍수에 오히려 물이 귀하다고, 그런 중에도 정작 찾아 읽을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매대를 꽉 채운 책을 보면서 나라도 이런 대열에 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결심을 깨고 책을 내기는 했다. 수준을 스스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흔하지 않은 정보를 정리해 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책이 부끄럽다거나 책을 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전문 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대체로 써놓은 글을 모아 책으로 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글의 형식이나 문체도 각양각색이다. 경어체와 평어체가 섞여 있기도 하고, 길이도 각각이고, 주제도 종횡무진이다. 그래도 책을 내려면 그렇게 써놓은 글 중 일정한 주제를 추리기도 하고, 길이도 맞추고, 형식이나 문체를 통일하는 노력은 보인다.
글 쓰는 게 직업이 아니라고는 해도 유명 인사쯤 되면 나름의 전문 분야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낸 책에 대해 일정 부분 기대를 걸게 된다. 경제 전문가라면 경제를 다룰 것이고, 법조계 인사라면 법과 관련한 글이 있을 거리고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다.
정년 퇴임하기 직전까지 대통령 탄핵 재판을 마무리하느라 애썼던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에세이집을 냈다. 법률과 관련한 내용이거나 판결을 앞둔 판사의 여러 상념을 다룬 글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런 글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30년 가까이 써오고 20년 가까이 개인 블로그에 올린 1,500편 중 120편을 선별했다는 글이어서 그런가, 주제가 지나칠 만큼 다양했다.
탄핵 재판 이전에 한동안 관심을 받았던 김장하 선생 방송에 김장하 장학생으로 인사말 하는 모습, 헌법재판관 청문회에서 그 사실을 거론하며 감사와 소신을 밝힌 모습을 보았던 터라 낯설지 않았고, 퇴임 이후에 몇몇 매체에서 보인 소탈함과 유머러스한 모습 때문에 탄핵 재판장으로서가 아닌 사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그는 머리말에서 평생 책 한 권 내는 것을 꿈꾸었던 사람으로 이 책의 발간이 큰 의미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이라며 책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했다.
지루한 비행시간을 잘 견뎌보자는 생각으로 소설 한 권과 함께 읽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내내 지루했다. 아마 책이 지루해서는 아니고, 비행시간이 너무 길어 그랬을 것이다. 저자께서 책을 내려는 꿈은 이루셨고, 이제는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게 어떠실까 싶다.평생 판결을 하신 분이니 글 쓰는 게 직업이었던 셈인데, 글도 글 나름이 아니겠는가. 소 잡는 칼이 있는가 하면 손톱 다듬는 칼도 있고 연필 깎는 칼도 있게 마련인걸.
그렇기는 해도 존경하는 동료 판사의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몇 시에 뭘 타고 어디 도착했고, 몇 명이 참석했고, 어떤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돌아온 시간과 차편, 추도식 2부 행사로 가진 자리에서 제조한 폭탄주 비율이 ‘맥주 7에 소주 3인 소폭’이었다는 서술은 기록에 철두철미해야 할 판사의 성향을 고려해도 에세이로서는 좀 그렇다.
판사로서 평소 소송 당사자들에게 아쉬웠던 점을 정리해 놓은 부분은 매우 유익했다. 사실 그런 내용에 대한 기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인데.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할 때는 결론을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해 사건 윤곽을 파악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해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정상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할 때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는 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해롭습니다. 재판이란 당사자의 도덕성을 심판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여러 가지로 정의된다. 그러나 재판에서 진실은 오로지 증거로 밝혀진 사실만 의미한다. 어떤 당사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면 판사가 진실을 밝혀 줄 거라고, 판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런 당사자들은 억울함만 되풀이해서 진술한다. 가까운 사람들이 작성한 탄원서, 진정서 제출도 이런 사람들이 즐겨 쓰는 방법이다. 아마도 조선 시대의 원님 재판을 원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