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회생활

by 박인식

선물


선물은 받을 사람에게 필요한 게 무난하다. 그러나 선물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걸 선물하는 것도 괜찮다. 필요한 건 선물이 아니라도 언젠가 구하지만 선물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건 선물로 받지 않는 한 쉽게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집들이 할 때 부서 여직원이 부서 선물로 꽤 비싼 찻잔 세트를 골라왔다. 그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골랐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라. 하긴 선물이 아니고서야 어디 부부 찻잔을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살 일이 있겠나. 그래서 그런지 그 찻잔을 보면 아직도 마음이 유쾌하다. (2002.08)



희망


인명구조지침에는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면 제일 먼저 주변에 있는 아무 것이나 던져서 그를 발견했다는 표시를 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구하러 갈 때까지 물에 빠진 사람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희망이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놓을 만큼 그렇게 강력한 것이다. (2004.05)



기쁨 나누기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생각하기에는 슬픔을 나누는 일은 몰라도 기쁨을 나누는 일이야 쉽지 않겠나 싶다. 하지만 기쁨을 나눈다는 것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다. 상대가 나만 못할 때는 상대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게 어렵지 않지만 상대가 나를 뛰어넘는 일까지 축하하는 건 여간해서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상대를 넘어서기 어렵다. 상대가 나를 뛰어넘었다면 마음이 불편해도 그를 축하하는 게 옳다. 진정으로 그가 이룬 걸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자기 부족함을 깨닫고 거기서부터 역전의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보다 앞선 사람을 인정하고 축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자세를 갖춘 것만으로도 이미 상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본은 갖춘 셈이다. (2004.12)



예술


예술은 표현이니 얼마나 정확하게 연주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 곡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얼마나 감동적으로 전달하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피아노음악의 본 고장인 유럽에서는 음을 정확히 연주하는 것보다는 곡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 하는데 더 비중을 둔다. 우리나라에서는 피아노 연주할 때 음이 틀린 걸 용납하지 않고 있으니 음악에 대한 정의가 다른 건가 아니면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 건가? (2006.01)



교통법규


법보다는 법 정신이 더 중요하다. 교통법규는 안전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교통이 수월하게 흐르도록 만든 것이니 그것을 법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TV 프로그램에서 인적이 끊어진 새벽에 교통신호에 따라 교차로에 멈춰 서있는 차량을 준법정신의 귀감이 되는 사례로 방송한 일이 있다. 남이 보지 않는 데도 법을 지켰다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인적이 끊어진 새벽길에 교통법규를 지켜 교차로에 멈춰 서있기를 요구하는 게 과연 법 정신에 맞는 일일까? (2006.04)



복을 받아 베푸는 선


선을 행하여 복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선을 행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을 행하여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선을 베풀고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상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을 베푸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로 선을 베푼다고 생각하면 선을 베풀고 나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던 그렇지 못하던 그로 인해 마음 상할 까닭이 없다. (2006.10)



소임을 다하고 받는 대접


대접은 소임을 다한 것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접을 바라기에 앞서 그 대접에 합당한 소임을 다하라. (2006.11)



다스림에 길들여짐


독재자들은 국가를 경영할 때 주로 포상과 징벌을 무기로 사용한다. 그것은 사람이란 상벌로서 다스릴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일본사람들은 훈장을 좋아한다. 퇴역한 소방관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도 특이하지만, 오늘 아침 그걸 받겠다고 전국에서 모여들어 모닝코트로 기모노로 성장을 하고 호텔로비를 채우고 있는 노인네들을 보면서 일본인 자체가 다스림에 길들여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줄을 잘 서는 것조차도 그런 다스림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남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2006.11)



최선


최선을 다 한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망설임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쓸 수 있을 만큼 행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난 할 만큼 했으니 그 뒷일은 내가 알바 아니라는 책임 회피의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06.12)



주객전도


나이가 들어가니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육류보다는 나물이 훨씬 편하고 그 중에서도 향이 좋은 산채가 더욱 좋다. 산채는 나물로만 먹는 것도 좋지만 역시 비벼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산채비빔밥을 먹을 때 고추장은 넣지 않고 그저 참기름만 몇 방울 떨어뜨려 먹는데, 고추장을 넣으면 고추장 맛에 가려서 산채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빔밥에 고추장을 넣는 건 비빔밥의 맛을 더 내기 위한 것인데 고추장 때문에 비빔밥의 원래 맛을 느끼지 못해서야 되겠나. (2006.12)



담력 키우기


살다보면 겁나는 일도 참 많다. 그런데 겁이 나고 그래서 피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도 피하지 않고 맞서기만 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일이 이겨낼 수 없는 일보다 더 많았다. 그러니 겁나는 일이 닥쳐도 겁먹지 말고 일단 맞서는 게 중요하다.


담력을 키우는 데는 검도만한 것이 없다. 날아오는 칼에 눈을 깜빡여서는 도무지 상대를 이길 재간이 없으니 눈을 뜬 채로 눈에서 칼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자니 자연 담력이 늘어날 수밖에. 아이가 겁이 많고 소심한가? 그렇다면 한 번 검도를 시켜보시라.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라면 당장 검도를 시작해 보시라. 도장에 아이 엄마도 많고 나 역시 사십이 넘어서 검도를 시작했으니 약하다는 것도 나이가 많다는 것도 어디 핑계가 되겠나. (2007.05)



문제아


문제아란 없다. 다만 문제 상황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살피지 않고 문제아라는 낙인을 찍는 것으로 끝낸다. 그러니 어떻게 문제아를 바로잡겠나? 문제아를 바로잡을 생각이라면 문제 상황부터 먼저 살필 일이다. (2008.08)



큰 그림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큰 그림을 그리자면 그림에 붙어만 있어서는 안 된다. 가끔 뒤로 물러나 그림이 원하는 구도로 채워지고 있는지 살펴야 하고 의도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기도 해야 한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뒤로 물러서서 자기가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살피고, 바른 길에서 벗어났다면 다시 길을 고쳐 잡아야 하지 않겠나. (2010.12)



개밥에 도토리


살다보면 개밥에 도토리 같은 신세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살펴봐도 개밥보다는 도토리가 형편이 나아 보이는데 도토리들이 개밥에 끼지 못해 안달이다. 그냥 이렇게 외치고 홀홀 뒤돌아서 가는 건 어떨까? “개밥들아 잘 있어라! 도토리는 간다!” (2011.02)



전쟁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을 옹호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기독교인 모임인 것으로 보인다. 하마스가 폭격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배경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러나 복음과 평화를 기도한다는 사람들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나는 폭격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여기고 그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국내 언론에서는 사상자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잔인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국내 보도지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제대로 깨닫기 어렵더라. 이곳에서는 국내와 달리 사상자에 대한 사진이 여과 없이 그대로 언론에 노출된다. 전에는 전쟁이 피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피해야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는데, 전쟁의 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언론보도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전쟁을 겪지도 않고 더구나 전쟁피해에 대한 적나라한 사진조차도 보기 어려운 상태에서는 전쟁에 대한 생각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겠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폭격이 피치 못할 상황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그것도 특별히 복음과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이스라엘의 가자 폭격을 옹호하려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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