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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ug 16. 2021

고발

비열한 인간들에 의해 증폭된 체제의 고통

반디

다산북스

2017년 2월  

   

피난민이신 어머니가 아직 생전에 계시지만, 북한을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생각해본 일도 없고 통일을 지상명제로 생각해본 일도 없다. 다만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할 선린 이웃 정도를 꿈꿀 뿐이다. 피난민이기는 해도 해도 일가친척 없이 혈혈단신으로 내려오셨으니 어머니 말고는 달리 북한 이야기를 들을 곳도 없었고 사는 게 고단하셨기 때문인지 어머니께서도 좀처럼 고향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는데, 아마 그게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북한에 살고 있으면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쓰는 반체제 작가의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북한이주민 숫자도 많고 그들의 활동도 많이 접하다 보니 북한 소설이라고 해서 딱히 새로울 내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미 떠나온 이들과 달리 작가가 지금도 북한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말에 내용이 궁금해졌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일 것이니 말이다.     


‘반디’라는 필명의 작가는 1950년 생으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있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고발할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쓴 소설을 브로커를 통해 북한 외부로 반출했는데, 그 중 단편소설 7편을 묶어 <고발>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집을 출간했다는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이 작품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가 번역해서 영국 PEN 번역상을 수상했고 이후 18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정도로 유명해진 작가가 그대로 북한에 남아 반체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게 가능한 일인지 조금 의아하기는 하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내기에 쓸 모를 죽였다는 이유로 적대 군중으로 분류되어 고초를 겪고 (탈북기),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김일성 초상화에 놀라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커튼을 닫았다가 가정혁명화에 등한하고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에 엄중한 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한밤중에 평양에서 추방되고 (유령의 도시), 1호 행사 때문에 교통 통제가 이루어져 어머니 임종을 하지 못하고 (지척만리), 원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제대로 제품이 생산되지 않은 책임을 애매하게 뒤집어쓰고 반혁명분자로 몰리기도 한다(빨간 버섯). 짐작했던 대로 늘 듣던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니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오히려 체제의 문제와는 별개로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떤 이유로 생겼던지) 신분에 묶여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이나 상대적인 우위를 가진 자들이 약자에게 저지르는 비열한 악행이 더 눈길을 끌었다. 말하자면 체제라는 배경만 걷어내면 우리 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우리 법은 신분으로 인한 차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분 차이는 더욱 공고해지고 이제는 역전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되기를 꿈꿀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탈북기>에서 주인공 리일철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수재이면서 비록 중학교 밖에 마치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대학 이상의 지식과 기능을 보유하게 된 노력파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모를 죽였다는 이유로 ‘적대군중’으로 분류돼 그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북한을 탈출한다. ‘적대군중’인 신분을 ‘지방대학 출신’으로 바꾸면 그냥 우리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준마의 일생>에서 해방 후 첫 공산당원이자 ‘마차 영웅’이라는 이름을 떨친 전쟁 노병 설용수는 전선을 가설하는데 거치적거린다고 평생 아끼던 느티나무를 베려는 안전부 요원을 제지하다가 다음날 밑동이 찍혀 나간 느티나무 앞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지만 심장마비로 마무리된다. 물론 소설에서 그것이 안전부장의 소행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탈북기>에서 부문당비서는 남편을 입당시켜주겠다며 리일철의 아내를 끊임없이 탐한다. <빨간 버섯>에서 고인식은 아무 것도 없는 된장공장에 기사장으로 부임해 수년간 죽을 고생 끝에 원료 일부를 자체 조달하고 공정을 개선해 질 좋은 된장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나 시당에서는 원료를 공급하지 못해 일어난 파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인민생활을 저해한 반혁명분자로 기소한다.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 욕심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미루기 위해 힘없는 사람을 억울한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우리라고 다른가? 그저 ‘갑질의 북한식 버전’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결국 작가의 소설들은 체제 때문에 받는 고통이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해 혹은 자기 책임을 면하기 위해) 비열한 인간 군상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행으로 증폭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뭉뚱그려 체제 비판으로 여기는 것은 오히려 작가의 의도를 희석시키는 일이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책의 앞머리에서 이 작가의 작품은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 그를 ‘북한의 솔제니친’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들어 있는 체제 비판이 그동안 제기된 여느 것과 다르지 않고 문학적인 완성도도 과연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과거가 아닌 현재 그 체제 아래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후의 작품도 소개되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더 이상 작품을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이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내용이 별다를 게 없어서일 수도, 문학적인 완성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남북의 언어가 상당히 달라졌다고 들었다. 이 작품에도 이해를 돕기 위해 몇몇 단어에 각주를 붙여놨지만 그 숫자가 얼마 되지도 않고 그것 말고는 달리 이해하는데 지장을 받을만한 표현이나 표기도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출판사에서 북한식 표기를 한글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수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왕이면 그것도 각주로 달아놨으면 좋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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