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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06. 2021

고독사를 피하는 법

스프레드시트

리처드 로퍼

진영인 옮김

민음사

2021년 6월


친구들의 부음을 듣는 게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죽음이 내 일이 되었다는 말이다. 삶을 잘 마무리하고 싶고 그것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그 마지막 자리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죽음과 죽음을 맞는 모습에 대한 글에 눈길이 끌린다. 요즘 부쩍 그런 책이 늘었다. 돌아보니 관심도 많고 생각도 많았는데 정작 그런 책을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고독사를 피하는 법>이라는 제목에 끌려 살펴보니 런던 어느 구청에 소속되어 고독사한 사람들을 장례지내고 뒷일을 수습하는 공무원의 이야기라고 했다.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제목이 그렇게 붙었으니 아마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고독사한 이들의 이야기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주인공인 앤드류가 동료들과 부대끼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갔다. 생각과 달라 반쯤 읽다가 결국 접었다. 어느 독서방송에 이 책이 올라왔다.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고독사에 대한 책이 아니라고 했다. 독신인 앤드류가 팀에 합류하면서 별 뜻 없이 내뱉은 거짓말 하나가 내내 그의 발목을 잡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새로 직장을 찾아야 했던 앤드류는 면접 자리에서 얼떨결에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면접관이 먼저 자기 가족 이야기를 꺼냈고 반쯤은 그에 장단을 맞춘다는 정도 생각으로 대답한 것인데, 뜻밖에 면접을 통과하고 팀에 합류하게 되자 생각지도 않았던 곤경에 처한다.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 그에 관계된 상황이 하나둘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따라서 변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을 꾸며대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근무 초기에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앤드류는 일에 정신이 팔린 척 하거나 질문을 잘 듣지 못한 것처럼 다시 물어보면서 대답을 생각해내야 했다. 결혼반지를 끼고 있냐는 동료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자기 손가락부터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단순한 사실과 대략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스프레드시트를 펴놓고 가족 이야기를 채워 넣기에 이른다. 이름, 나이, 머리카락 색, 키. 그리고 몇 주 동안 여기에 세밀한 정보를 덧붙이기 시작한다. 아내의 직장과 담당업무, 근무시간, 결혼기념일. 심지어 첫 키스에 대한 기억과 처음 본 영화까지 만들어내야 했다.


그렇게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던 앤드류는 차라리 거짓말이 송두리째 꼬여버리거나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뒤엎는 상황이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퇴근해서 스프레드시트에 새로운 정보를 채워놓는 대신 급기야 다른 직장을 찾기에 이른다. 하지만 소설은 그가 쉽게 거기서 벗어나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렇게 근무를 이어가던 앤드류는 남편과 아이가 있는 동료 페기와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페기는 알코올중독자인 남편과 결별을 생각하지만, 스스로 아내와 아이가 있다고 말한 앤드류는 가까이 가지도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한다. 소설은 후반으로 가면서 앤드류와 페기가 어떻게 가까워지고 앤드류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이야기가 쏠린다.


당초 이런 이야기를 읽을 생각으로 책을 고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충 결말만 확인하고 덮었다. 문득 내가 책 소개를 잘못 읽었나 싶어 다시 확인해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리뷰도 꽤 많이 올라왔는데 모두들 고독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 역시 고독사에 초점을 맞춰 책을 골랐고 잘못 골랐다는 걸 알고 나서 책을 덮었는데 말이다. 다시 한 번 책을 훑어봤지만 여전히 고독사는 배경이었을 뿐, 그에 대한 눈에 띄는 표현도 통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득 학교 다닐 때 대학 뱃지 하나 구해 달았다가 지역을 떠나야 했던 녀석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마땅히 할 일 없던 그가 대학생들이 어울리던 곳을 기웃거리다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대학 뱃지를 구해 달고 끼어들었다. (그때는 학생이면 모두 뱃지를 달았다.) 할 일이 없던 그는 동아리 일에 헌신적으로 나서서 곧 선배들 눈에 들었다. 그렇게 동아리의 중추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꾸며대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름수련회를 갔는데 마지막 날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그가 거짓말한 게 드러나 큰 망신을 당하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소설에서 앤드류는 한 번 저지른 거짓말을 깨지 않기 위해 스프레드시트까지 동원한다. 그 때 그도 스프레드시트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거짓말이 드러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머리를 짜내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마음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한 때 해프닝처럼 지나간 일이었지만 그 일이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잠깐만 눈 감으면 망신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닥쳤을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났고, 그래서 피하지 않고 망신을 당했다. 지나고 나면 모면할 수도 있는 일인데 괜히 미련을 피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그때 일이 너무도 선명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은 스프레드시트나 있지. 당시 나는 스스로 그걸 감당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만큼은 지혜로웠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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