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 탈출사
이시백
삶이 보이는 창
2006년 9월 25일
나는 누가 말하면 대개는 그런 줄 안다. 사람을 잘 믿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사람을 잘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는 게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남들과 함께 청년으로 칠팔십 년대를 살아왔는데도 그 시대의 문제를 그렇게 절박하게, 치열하게 여겨본 기억이 없다. 지금이야 그때 살았던 세상이 험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당시에는 놀기 바빴고 졸업하기 바빴고 살기 바빠서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글을 보면 하나같이 폭압과 독재에 맞섰다거나, 맞설 용기는 없었지만 폭압과 독재에 분노했고 함께 맞서지 못해 부끄러웠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거의 모든 사람이 과거를 그렇게 회고하는데 왜 당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다른 세상에 살았던 모양이다.
칠팔십 년대를 무대로 하는 소설을 읽었다. ‘미도솔 도레미도 파미레도솔’과 ‘244 5844 44445’을 기억하는 걸 보면 작가는 나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아래인 것이 분명하다. 그는 폭압과 독재의 그늘에서 신음한 많은 이들을 기억했고, 그것을 비틀어 희극으로 승화시켰다. 그늘이라는 건 빛을 가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나와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던 모양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몰랐거나 외면한 결과일 것이다.
작가는 당시 영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국민들은 쓸데없이 나랏일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원만한 성생활을 위해 인간 본능에 충실한 영화에 몰입하라는 배려이기도 했으며, 제작자로서는 쿠션 좋은 침대 하나와 의상비도 거의 필요 없는 나신의 배우 둘만 있으면 만들어내기에 서로 좋았다. 그래도 무언가 나라 돌아가는 일에 불만이 많은 이가 있다면 한바탕 깡패들이 벌이는 싸움 장면을 보며 기분을 풀면 될 일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것이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은 프로야구가 성애 영화, 조폭 영화와 함께 당시 정부가 펼친 우민정책의 하나였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의도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와 별개로 프로야구를 그렇게만 보는 게 타당한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룰북과 스코어북을 끼고 다닐 만큼 야구를 심히 좋아했고, 프로야구 도입을 고대했으며, 프로야구 출범을 위해 야구인들이 쏟은 헌신과 노력을 익히 아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물론 비판은 그것으로 의미가 있으니 굳이 균형을 맞춰야 할 일은 아니다.
읽다 보면 작가의 시각에 흔쾌히 동의되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하지만 젊은 날의 흔적이 배어 있는, 그때로 돌아갈 수 있어서 충분히 흥미로웠다. 작가는 등화관제와 삼청교육대와 장발단속, 그보다 더 오래된 김일과 장영철과 그들이 펼치는 프로레슬링과 그것을 보기 위해 찾은 만화방을 기억의 저편에서 불러올린다. 매혈 현장을 그려냄으로서 가난이 어디까지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학교에서 일상으로 벌어졌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체벌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깨닫게 만든다. 또한 지금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성차별적이고 퇴폐적인 묘사가 당시에는 구수한 입담이라는 말로 용인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집은 문학서로서보다는 칠팔십 년대의 시대상을 박제해 놓은 역사서로 효용가치가 더 높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몇 년 전에 소설에 나타난 묘사를 추적해 현대적 도시로서의 <서울 탄생기>를 구축해낸 이가 있었는데, 이 소설집으로는 <개발도상국 탈출사>의 초석 정도는 놓을 수도 있겠다. 예컨대 작가는 2000년 당시 최저생계비로 매끼 짬뽕까지는 아니고 짜장면 사먹을 정도는 된다고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월 최저생계비가 짜장면 아흔 그릇 값이었더라는 것인데, 살펴보니 올해는 이백 그릇은 사먹겠더라. 이십 년 사이에 살림이 나아지기는 한 모양이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으로 읽다 보니 매 작품마다 발표한 시기를 적어놓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소설을 이야기로 읽는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이 어느 문학 사조에 속하는지, 문장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독자를 이야기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소설, 읽고 나서 여운이 남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할 만큼 단순한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소설집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의 비평에서 모더니즘이니 아방가르드니 입체파니 하는 낯선 용어를 만나면서 내가 독자로서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이야기인데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몇몇 작품은 에세이나 칼럼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소설의 정의를 찾아보니 맨 먼저 픽션이라고 나온다. 픽션은 꾸며낸 이야기이니 소설을 이야기로 읽는 내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작가가 이 작품집을 <자유단편소설집>이라고 명명했는데 단편소설집 앞에 독특하게 ‘자유’라는 말을 붙인 것이 소설과 다소 성격이 다른 작품을 포함했기 때문은 아닌가 모르겠다.
여기에 실린 수십 편의 소설 중에 몇 편을 빼놓고는 원고지 20매 이하의 엽편(葉片)소설 혹은 장편(掌篇) 소설에 속할 만큼 짧다. 이렇게 짧은 소설을 콩트라고 분류하는 것 같아서 확인해보니 기승전결을 갖춘 엽편소설과 달리 콩트는 반전이 필수적인 요소로 들어가야 한단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 대부분이 콩트로 분류될 만큼 반전의 묘미가 돋보인다. 한 마디로 재미있다는 것인데, 그게 내 또래 사람에게는 분명히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지는 잘 모르겠다.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것이니 말이다.
하나 귀에 걸리는 것이 있다. 장발단속을 묘사하는 <펑크머리>에서 갑오경장 다음해에 내려진 단발령에 거부하는 주장을 ‘가단두(可斷頭) 불가단발(不可斷髮)’이라고 인용했는데, 이의 출처인 최익현의 상소문에 들어있는 글귀는 ‘오두가단(吾頭可斷) 차발불가단(此髮不可斷)’이었다.
참, ‘미도솔 도레미도 파미레도솔’은 당시 국민학교 6학년 음악책 첫머리에 실린 <대한의 노래>의 계명이고 ‘244 5844 44445’는 각 음계의 박자를 표시한 것이다. 2는 이분음표, 4는 사분음표, 8은 팔분음표이다. 놀라지 마시라, 5는 점사분음표. 그렇다면 점이분음표는 3, 점팔분음표는 9가 된다. 오선지만 있으면 악보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내 나이의 사람이라면 이건 누구든 외운다. 놀라지 말라고 했지만 어찌 안 놀라겠는가. 지금 교육열풍? 댈 것도 아니다. 중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새벽 두 시까지 과외공부를 했다.
그때는 모두 제 정신이 아니었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