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는 달이 중천에 떠있는 새벽에 학교에 간다고 나섰다. 서머타임이 이달 말께 끝날 테니 그때는 조금 나아지겠지만, 이제 막 자라는 아이들에게 너무 이른 시간이다. 명색이 중학생이니 굳이 버스 타는 곳까지 따라 나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아침마다 가방을 들어다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메고 다니는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지 들을 때마다 안쓰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 처음에는 불편해 하던 큰애가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맨몸으로 앞장선다. 그게 할아버지 낙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유치원에 걸어서 다니던 작은애는 춥다면서 차로 데려다 달란다. 아내 옆에 딱 붙어서 곁을 내주지 않더니 며칠 데리러 가서 공들인 보람이 있었는지 이제는 할아버지 찾는 소리가 입에 붙었다. 오늘은 일이 있어 데리러 가지 못한다고 하니 그러면 내일은 꼭 데리러 와야 한다며 다짐을 받는다. 유치원에 들어가는 걸 보고 돌아서는데 고사리 손의 온기가 그대로 손에 남았다. 이것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해외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 해에 한 달 휴가를 받았다. 한국 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 달이나 되는 휴가지만 반을 쪼개 어머니 뵈러 가고 나머지 반으로 아이들 보러 오자면 넉넉한 시간은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도착한 날부터 아이들 놔두고 돌아설 일이 걱정이었다. 이제는 묶인 몸이 아니어서 두 달을 뚝 떼어 아이들과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꿈같던 시간도 다 지나고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여행이었다면 지금쯤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여태까지 아이들과 지내던 날의 몇 배를 있었는데도, 돌아가기가 아쉽고 섭섭하기는 예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
가끔 애들 손잡고 서울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구경하고 설명도 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가 있다. 큰애 돌 때, 그리고 유치원 다닐 때 서울에서 잠깐 본 일이 있을 뿐이다. 연말에 아이들 외가에 일이 있어 서울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멈이 그때 혜인이 박물관 좀 보여 달라고 부탁한다. 아이 손잡고 그렇게 다니는 꿈을 한두 번 꾼 게 아니었는데. 성찬 때 목사님께서 아이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해주시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그렇고.
두 달 있으면 다시 볼 테니 이번에는 좀 가볍게 돌아설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십중팔구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