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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Nov 07. 2022

베를린 오페라극장

Deutsche Oper Berlin, Staatsoper Berlin,

통일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는 오페라극장이 <베를린 도이체오퍼, Deutsche Oper Berlin>, <베를린 슈타츠오퍼, Staatsoper Berlin>, <베를린 코미셰오퍼, Komische Oper Berlin> 이렇게 세 곳이나 있습니다.


1742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령으로 건립된 왕립 오페라극장(Königliche Oper)은 1919년 프로이센 슈타츠오퍼(Preußische Staatsoper), 1955년 도이체 슈타츠오퍼(Deutsche Staatsoper)를 거쳐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베를린 슈타츠오퍼 Staatsoper Berlin>가 되었습니다. 1912년 건립된 도이체스 오페른하우스(Deutsches Opernhaus)는 1925년 시립 오페라극장으로(Städtische Oper)로 바뀌었다가 1933년 나치 시절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치 시절 극장장을 비롯한 여러 음악가들이 정권에 저항해 극장을 떠났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복귀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자 서베를린에 1,859석의 <베를린 도이체오퍼 Deutsche Oper Berlin>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1892년 1,270석 규모로 건립된 <베를린 코미셰오퍼 Komische Oper Berlin>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파괴되었다고 전후에 복구되었습니다. <베를린 코미셰오퍼>는 모든 작품을 독일어로 공연하며, 해외 공연 때도 이 정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베를린 도이체오퍼>는 서베를린, <베를린 슈타츠오퍼>는 동베를린, <베를린 코미셰오퍼>는 독일어 공연, 이렇게 구분하시면 쉽습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전신인 프로이센 슈타츠오퍼는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고 폭격으로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무자비한 런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1941년 4월 연합군이 베를린을 폭격할 때 파괴되었지만 당시 집권하던 히틀러의 제3제국이 정치적 선전가치를 높이 평가해 즉시 복구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2월 다시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패전 국가가 된 독일은 부족한 재정을 무엇보다 시급한 기반시설 건설에 사용해야 했지만 정부와 국민은 이 극장의 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선택했습니다. 오페라와 독일 문화에 대한 독일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많은 음악가들이 서독의 베를린 도이체오퍼로 떠나고 동독 정부의 무관심으로 시설이 낙후된 채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페터 슈라이어와 같은 동독이 자랑하는 위대한 음악가들로 인해 명성이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통일 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을 음악감독으로 영입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바렌보임은 도이치 슈타츠오퍼 250주년이던 1992년 음악감독이자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다른 독일 극장에 비해 뒤떨어져 있던 이곳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극장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의 주도로 2010년에 극장 개보수공사를 시작해 2017년 2,065석으로 재개관했습니다. 외관은 그대로 놔둔 채 시설을 현대화한 것이지요. 정식 명칭은 <슈타츠오퍼 운터덴린덴 Staatsoper Unter den Linden>입니다. 운터덴린덴은 도이치오퍼 앞의 유서 깊은 도로 이름이니 ‘운터덴린덴 거리에 있는 국립오페라’라는 뜻이 되는 셈입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Staatsoper Berlin>


<베를린 도이체오퍼>는 1912년 11월 7일 ‘프로이센에서 가장 부유한 마을’인 샤를로텐부르크에 건설되어 이그나츠 바그할테르가 지휘한 베토벤 ‘피델리오’ 공연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1925년 시립 오페라극장이라는 뜻의 슈테티체 오퍼(Städtische Oper)로 바뀌었다가 1933년 나치 정권에서 다시 도이체스 오페른하우스(Deutsches Opernhaus) 바뀌었습니다. 당시 이 극장은 요세프 괴벨스가 장관으로 있던 공공계몽선전부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괴벨스는 그와 라이벌이었던 프로이센 장관 헤르만 괴링이 통제하는 도이체 슈타츠오퍼를 의식해 이름을 그렇게 바꾼 것입니다. 1935년 극장을 리모델링하면서 좌석이 2,300개에서 2,098개로 줄어들었습니다. 극장장이었던 칼 에베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나치의 통제를 거부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글린드본 페스티벌을 시작했습니다. 1943년 11월 23일 영국 공군의 공습으로 극장이 파괴되자 베를린 미테 지역에 있는 아드미랄스팔라스트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5년까지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칼 에베르트가 다시 극장장으로 복귀하고, 슈테티체 오퍼라는 이름을 되찾고, Theater des Westens로 자리를 옮겨 공연을 이어갔지요. 마침내 1961년 1,859석의 극장을 복구하고 9월 24일 모차르트 ‘돈조반니’ 공연으로 <베를린 도이체오퍼>의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브루노 월터, 쿠르트 애들러, 로린 마젤, 주세페 시노폴리,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같은 쟁쟁한 지휘자들이 음악감독을 역임했습니다. 이 중 시노폴리는 베르디 ‘아이다’를 지휘하던 중 지휘대에서 54세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이 극장에 <베를린 슈타츠발레>가 둥지를 틀고 있기도 합니다.


<베를린 도이체오퍼, Deutsche Oper Berlin>


<베를린 코미쉐오퍼>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며, 모든 오페라를 ‘독일어로만’ 공연합니다. 1892년에 세워진 이 오페라극장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글로벌예술 오페라를 독일의 입장에서 계승 발전시킨다”는 목표로 동독 정부가 임명한 연출가 발터 펠젠슈타인이 극장의 입지를 굳히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운터덴린덴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던 이 오페라극장은 파산, 국유화, 폭격과 같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66년 12월 4일 1,270석을 갖추고 모차르트 ‘돈조반니’ 공연으로 재개관했습니다. 1986년에 추가 복원작업이 이루어졌고 1989년 무대장치를 현대화했습니다.


<베를린 코미셰오퍼, Komische Oper Berlin>


1990년 독일 통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세 오페라극장 모두 연방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지원에 힘입어 번영을 누렸으나 1990년대 말 독일의 경기침체로 연방정부의 지원이 급감하자 베를린 주정부는 <베를린 도이체오퍼>와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합병을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됩니다. 이후 베를린 주정부는 베를린 오페라재단을 세워 세 오페라극장이 동시에 같은 작품을 공연하지 않도록 유도한다는 방안을 베를린 의회에 제안하고 베를린 의회는 감축을 전제로 이를 받아들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04년 1월 세 오페라극장과 슈타츠발레(Staatsballett Berlin), 무대서비스(Bühnenservice Berlin)로 이루어진 베를린 오페라재단(Berlin Opera Foundation)이 출범합니다. 우려와 달라 새로운 재단으로 통합된 후 각 기관들은 예전보다 독립성이 더 높아졌습니다. 세 오페라극장에서는 각 예술감독 지휘 아래 공연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집행하게 되었으며, 무대서비스는 세 오페라극장의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총괄 운영하고 있으며, 각 기관의 인사 예산 회계는 재단사무국에서 관장하고 있습니다. 재단은 연방정부와 베를린 주정부의 보조금으로 운영하며 이 중 베를린 주정부 보조금은 주로 건물 관리와 개보수에 사용합니다. 재단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실행이사회는 무대서비스를 제외한 4개 기관의 예술감독(artistic director)과 극장장(managing director), 그리고 재단대표가 협의해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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