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련
글항아리
2023년 2월 10일
독서모임에 중년의 간호사 한 분이 나오는데, 근무하는 병동이 바뀌어 적응하느라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서 몇 달째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따뜻한 미소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 몸에 배인 분이어서 반날 때마다 반가웠던 터라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난 연말에 몇 분이 함께 만나 식사도 하고 힘내시라고 격려도 했다. 경력이 이십 년을 훌쩍 넘는 간호사도 병동 바뀌면 그렇게 고달픈 모양이었다. 이전에도 열악한 근무 여건에 대한 말을 들었지만, 그날 비로소 간호사들이, 또 그분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움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분을 위해 기도해 오고 있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간호사가 열악한 근무 상황을 고발하는 책을 냈다고 했다. 공교롭게 모임에 참석하던 그분과 같은 병원이었다. 지금은 뉴욕 시립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국 병원의 상황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인지, 한국 병원의 상황을 고발한 것에 대한 비난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이곳 상황을 견디지 못해 탈출한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뭐 중요한 일일까.
매스컴에 ‘태움 문화’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 십여 년쯤 되었을까? ‘태움’이라는 것은 선배간호사가 신입간호사를 혹독하게 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지금까지 그것을 견디다 못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는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적지 않다. 저자는 ‘태움’은 결코 문화일 수 없다고 말한다. 병원에서 자행되는 ‘태움’은 부인할 수 없는 ‘폭력’이고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문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의도적인 가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설명은 하지만, 의도가 없었다고 ‘폭력’이 ‘폭력이 아닌 것’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신입간호사 과정을 넘긴다고 해서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간호사들이 환자들에게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당하는 수모는 상상을 넘어선다.
“아프고 짜증난다고 손바닥으로 간호사 얼굴을 후려쳤다. 장운동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을 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갈증을 덜어주겠다고 스프레이에 담아 물을 뿌려주자 화를 내더니 간호사에게 침을 뱉었다. 자기에게 소홀하다는 이유로 콜벨을 누르고 그 소리에 중환자 처치 중에 달려간 간호사에게 ‘이거 누르면 네가 오나 안 오나 한 번 해봤다’고 했다.”
그것 뿐 아니다. 여동생 같이 친근하다는 이유로 호의의 표시라는 모양으로 가해지는 성희롱과 성추행을 불편해하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을 견뎌야 하고, 의료진으로서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의사의 수발을 드는 정도로 여기는 환자들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매일 죽어나가는 환자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를 잃은 가족의 상실감이야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겠지만, 저자는 그 분노가 모두 사정없이 간호사들에게 투사된다고 말한다. ‘삶에서 가장 힘든 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이라고 해서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매일 죽어나가는 환자들의 고통에 매 순간 공감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면 우리는 하루도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집안에 환자가 하나만 있어도 집안 분위기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라앉는다. 내 어머니는 젊은 날 늘 편찮으셨고 그래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러면서 그런 환자를 평생 보고 살아야 하는 의사는 어떨까, 그 이유만으로도 의사가 월급을 많이 받아야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이 간호사의 길을 걷기로 선택했을 때 그걸 몰랐을까?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업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최소한의 헌신은 각오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알고 있었던 난관에 좌절하는 것은 그 정도가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삶이 너덜너덜하게 무너져 가도록 만든 과중한 업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중한 업무가 그들의 모든 삶을 무너뜨린 것이다.
“측은지심은 본인이 측은하지 않아야 생긴다. 본인 삶이 너덜너덜하고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관대하고 다정한 것은 각고의 노력을 요구하는 일인데다, 심지어 노력을 기울여도 겉모습의 일부를 그런 척 꾸미는 것만 가능하다. 표정 없고 기계적으로 친절한 목소리를 내는 간호사는 그렇게 탄생한다.”
병원에 신입간호사가 들어오면 선배간호사가 ‘그를 데리고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에게 실무를 가르친다. 이런 제도는 전 세계병원에서 공통적으로 간호사 교육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선배간호사의 업무량이 과중한데 신입간호사를 지도하는 일 뿐 아니라 신입간호사에게 할당된 업무도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신입간호사가 실수하면 그것은 선배간호사의 실수가 되며, 실수를 수습하고 보고하고 문책 당하는 것은 모두 선배간호사가 감당해야 한다. 신입간호사는 그저 죽도록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처분을 기다려야 하고, 선배간호사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할 수 있고, 실수한 간호사라는 이유로 조리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태움’의 토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태움’은 폭력이고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업무가 과중하지 않다면 이 중 상당부분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병원이 간호사에게 과중한 업무 부담을 지우고, 거기에 아무런 대가도 지급하지 않으면서 추가로 신입간호사 교육을 맡길 뿐 아니라 그의 실수까지도 책임지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와 같이 신입간호사를 교육하는 방식은 그저 병원에게만 편리한 제도라고 고발한다.
“신입직원을 교육하는 회사는 실수 또한 교육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신입간호사의 실수가 일어나지 않는다. 신입간호사의 책임은 온전히 선배간호사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병원은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 신입간호사를 교육하고 교육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위험은 모두 선배간호사의 책임으로 돌린다.”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간호사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지적하는데, 우선 간호사의 절대수가 모자란다며 그 구체적인 상황을 이렇게 밝힌다.
“의료법에서는 종합병원의 간호사 배치기준을 입원환자를 2.5명으로 나눈 수라고 규정한다. 이 말은 간호사 한 명이 환자 2.5명을 돌본다는 말이 아니다. 간호사는 24시간 근무하기 때문에 3교대 근무를 하고 비번도 있다. 그러니 돌봐야 하는 환자가 네 배인 10명이 된다. 놀랍게도 간호사 수에는 행정인력과 외래, 수술실 인력이 포함된다. 그러니 의료법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킬 경우에도 실제로 간호사 한 명이 돌봐야하는 환자는 13명 정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의료법에서 정해놓은 기준을 충족하는 정도는 종합병원이 63%, 일반병원이 19%이다. OECD 평균 간호사 한 명이 돌봐야 하는 환자는 6~8명이다. 2016년 미국은 5.3명, 한국 종합병원은 16.3명, 일반병원은 43.6명이다. 그나마 간호사가 병원에서 설정한 적정 수준만큼 확보되었다 하더라고 그것은 미달이라고 봐야 한다. 선배간호사는 신입간호사를 가르치면서 본인 환자를 다 책임져야 한다. 그럴 경우 선배간호사가 환자를 덜 담당하거나 신입간호사만을 전담으로 가르치는 선배간호사가 투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환자실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보여주고 있다.
“중환자실에서는 환자 18명을 간호사 9명이 돌본다. 이것만 보면 매우 이상적이다. 하지만 책임간호사들은 근무경력이 1년 미만인 신입간호사의 비율이 40%를 넘지 않도록 근무표를 짜는데 안간힘을 다한다. (신입간호사가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경력 1년이 안 된다는 것은 일이 익숙지 않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때에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시로 들여다봐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는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거기에 최소한 세 명이 달라붙어야 한다. 그러면 남은 간호사는 6명. 그 중 신입간호사가 3명이다. 그렇게 되면 선배간호사 3명이 신입간호사 3명을 지도하며 환자 18명을 돌봐야 한다. 긴급 상황이 두 건이 일어나면 선배간호사 1명이 신입간호사 2명을 지도하며 환자 18명을 돌봐야한다.”
바로 이와 같은 열악한 근무조건 때문에 신입간호사들이 고작 몇 달에서 몇 년을 견디고 아수라장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다. 소모전의 연속이고, 그래서 다른 나라에 비해 연령대가 매우 낮다. 우리나라는 20대 간호사가 36.5%로 압도적으로 높은데 비해 호주, 케나다, 프랑스, 미국 간호사는 50% 이상이 35~50세라고 한다. 숙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간호사 절대수가 모자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역량도 떨어지니 간호사 개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업무량은 다시 그만큼 추가되어 짐으로 얹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간호대학 증설이다. 간호사가 부족하니 간호사를 더 양성해서 메워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반대로 이 제도 덕분에 병원은 더 쉽게 콧대를 높이며 어린 간호사들을 위협해 말 잘 듣고 ‘대체가능한 나사’ 하나로 만든다.
간호사들의 근무여건이 열악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 정도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십 수 년을 살았던 리야드에 한국 간호사가 백여 명 가까이 일하고 있었다. 급여 조건이 크게 높은 것도 아니었는데 왜 굳이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갈까 의아했다. 리야드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 올려놓은 글을 보면 적어도 업무량만큼은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적었다. 이방인으로 사는 고단함을 감수하고라도 좀 더 쾌적한 근무조건을 찾아온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죽지 않기 위해서 그곳으로 탈출했던 모양이다. 결국 한국을 탈출하는 것이 이방인으로 사는 고단함을 상쇄하고도 남았다는 것 아닌가.
이러한 과중한 업무 부담을 감당해가며 간호사로 살아남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도중에 그 길 걷기를 포기한 이들이 수두룩하고, 그래서 간호사 면허를 가진 이들 중 겨우 절반만 현장을 지키고 있단다. 경험을 가진 이들이 자꾸 떠나니 신입간호사의 비중이 늘어나고, 그 부담이 추가된 경험 있는 간호사들이 떠나고, 다시 신입간호사의 비중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이다.
병원도 간호사를 충분히 확보하지 않거나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를 알고 해결책이 있는데도 문제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상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아직 병원이 축재의 수단으로 쓰인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 그러니 간호사 인력의 절대 부족은 병원 수입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의료수가에 직결된 일인데 그 문제는 풀리지 않는 무한루프에 빠져있고. 저자는 이 모든 일은 대형 사립병원의 고용부족과 간호사들의 비참한 처우에 대한 책임감 부족, 해결의지 부재를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병원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왜 간호사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고 어떻게 해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책 절반이 넘어가도록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피를 토하듯 토로하는 글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저자는 그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때 나는 빠져나갈 뒷문을 열어두듯 어떻게 죽을지 계획을 세웠다. 할 수만 있으면 병원에서 떨어지고 싶었는데 그곳은 명색이 병원이라 못 떨어지게 대비를 많이 해 놨다. 내 두부 외상을 보는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게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떨어져야겠다 싶어서 미국에서 쓰레기봉투로 쓴다는 두껍고 튼튼한 비닐봉지도 구입했다.”
저자가 죽는 게 해결책일 수 있겠다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그럴까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죽을 방법을 계획하고 일부를 실천하기까지 한 것이다. 읽으면서 저자가 매우 고통스러웠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에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삼분의 일쯤 남겨놓고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겪는 상황과 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었다.
저자가 남성이었다면 글의 순서와 내용에 따른 분량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극한 환경에 몰리게 된 구체적인 상황과 그 원인을 먼저 충분히 설명하고, 뒤에서 당시 자신이 느꼈던 절망감이나 고통을 추가하는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저자가 자신이 느꼈던 절망감이나 고통에서 시작해 책의 상당 부분을 그것으로 채우고 뒤에 상황과 원인을 부수적으로 언급했던 것과는 달리. 문제 자체에 집중하는 남성의 성향과 그 문제로 인한 자신의 심경에 집중하는 여성의 성향 차이 때문이 아닐까? 아마 여성 독자라면 저자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그리고 크게 공감했을 것이다. 물론 책의 주제와 무관한 생각이다. 그저 남성과 여성이 사안에 접근하는 방식이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정도라고나 할까.
매일 기도하는 것을 빼먹은 일은 있어도 기도할 때 저자와 같은 병원에서 아직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분을 잊은 일은 없다. 그분을 좀 더 이해하고 응원한다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오히려 해결될 가능성이 없는 문제라는 것만 확인해 실망스럽다. 그래도 그분이 누군가 기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