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결혼 적령기라는 것이 있었다. 결혼은 물론 자녀를 얻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려면 결혼이 너무 늦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때는 삼십대에 결혼하는 것도 늦었다고 했는데 이제는 삼십대에라도 결혼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에게 결혼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것도 결혼한 젊은이들에게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것도 실례를 넘어 무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전에는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정상적인 가정으로 여겼다. 이제는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표현 자체가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나 역시 그런 생각을 내보이는 것은 물론, 은연중에라도 그런 생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결혼할 의사가 아예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혼했을 때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든 사회적인 상황이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황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젊은이들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는 하다.
아이들 보러 갈 날이 가까워오면서 아내는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하다. 보나마나 가방 쌀 때 무게 맞추느라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여름에는 아이들이 이모 결혼식 때문에 다니러 올 텐데, 아이들과 서울에서 지내는 것이 처음이니 나는 오나가나 아이들에게 뭘 보여주고 뭘 먹일까 하는 생각뿐이다. 자식 키울 때는 미처 몰랐던 기쁨이다.
결혼을 생각하기 쉽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데, 희생은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니 남이 가타부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식은 부모가 살과 피를 나누어주어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나서 부모의 희생을 먹고 자란다. 부모의 희생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부모로서는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자식,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으로 인해 얻는 기쁨은 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 나누어준 것이 희생이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그것은 기쁨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니,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아내와 단 둘이 사는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둘이 사니 오붓하고 좋다. 그런데 혜인이 혜원이가 없었어도 지금처럼 오붓하고 마음이 넉넉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혼자 사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반려하면서 사는 것도 모두 아름다운 일이다. 억매이지 않는 자유함도 있을 것이고 성취감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 피와 살을 나눈 존재로 인한 기쁨만 할까? 하긴, 겪어보지 않으면 별 게 아니다 싶기는 하겠다. 짐작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잔소리로 들릴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