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3.10.19 (목)

by 박인식

성향인지 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계획 없이 살아본 적이 없다. 계획 세우는 것으로 모자라 그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한 계획까지 세워야 안심이 되곤 했다. 학교 다닐 때 계획 없이 한 해 시작했다가 그해 내내 엉망으로 살았던 쓰디 쓴 기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당하게 공사를 마쳤는데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공사비를 지급하지 않아 수 년간 소송에 매달렸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잠시 숨이라도 돌리고 올 생각으로 서울로 돌아온지 오늘로 꼭 두 해가 되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지만 그것이 아주 돌아온 일이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주 돌아온 것이냐는 질문에 한동안 어물거리고 살아야 했다.


두 해 동안 잘 지냈다. 개천 따라 산길 따라 마음껏 걷고, 읽고 싶은 책 마음껏 읽고, 그러다 눈 오면 눈 구경 꽃 피면 꽃 구경, 친구며 형제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냈다. 게다가 신물 나서 쳐다 보기도 싫던 그 동네 이야기로 번역도 하고 강의도 하고 이젠 책까지 쓰고 있다. 심지어 내가 사는 게 흥미진진해서 그 뒤만 따라다녀도 좋겠다는 이까지 생겼다. 이 정도면 잘 지내는 게 아니라 훌륭하게 지내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죽고 사는 일 아니면 다 넘어간다던 어른들 말씀이 옳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매번 죽을힘을 다했어도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데도 이렇게 훌륭하게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집에서 쌀국수 먹고 차도 인도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오토바이 보니 베트남이 맞기는 한가보다. 처음 보는 풍경인데도 낯 선 구석이 없다. 유튜브가 우리 삶을 참 많이도 바꿔놓았다.


잠시 형제들과 어울려 잘 놀고 돌아가서 책 쓰는 일 끝내면 올 한 해는 그렇게 마무리 되겠다. 시험만 안 보면 공부하는 것도 즐겁더라. 거기에 더해 책임져야 될 일만 없으면 바쁜 것도 즐겁더라. 아니 바쁠수록 더 즐겁더라. 백수가 과로사 한다니 바쁠 줄은 알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니 잘 지낼 줄은 알았는데, 덕업일치의 삶으로 임도 보고 뽕도 딸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늘 심은 것보다 많이 거두고 살아서 감사하고 민망했다. 그 삶도 오래 되니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젠 한 술 더 떠서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기대로 마음이 설레기까지 한다. 서울 돌아오고 나서 거짓말처럼 어지럼증이 사라지고 검은 머리도 난다. 바야흐로 다시 봄을 맞았다.


기왕에 다시 봄을 맞았으니,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던 봄이었으니, 이번 봄은 겨울나기 준비하는데 탕진하지 않고 온전히 즐기며 흘려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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