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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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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22. 2024

2024.03.21 (목)

많이 그려야 하루에 손바닥만큼 그린다고 했다. 오로지 철필 하나에 잉크 찍어서 세상을 화폭에 담아낸,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꾸역꾸역 십수 년을 그 일에 매달려온 삽자루 안충기 화백이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안 화백 말마따나 장안에 이상한 인종들이 다 모일 것 같아 그 이상한 인종들 만나겠다고 하던 일 팽개치고 교회 사경회도 나 몰라라 하고 허위 단숨에 달려갔다.


화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건물이었는데 화랑은 물론 계단까지 사람이 밀려있어 들어가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명색이 주인공인데 개막식 사회 보는 이가 이야기하는 동안 벌 받는 아이 모양으로 한쪽에 비켜서 있었다. 정년퇴직이 며칠 남았다는 그는 퇴임식 만들어준다는 신문사 계획을 뿌리치느라 휴가를 내고 잠수를 탔다. 퇴직하는 날까지 안 가겠단다. 참 별난 사람도 다 있지. 남들은 그런 자리에 서지 못해 안달이구먼. 그래도 그게 그답기는 했다.


그림 볼 줄 모르는 내가 봐도 그의 그림은 숨이 막힌다. 볼 때마다 저걸 다 어떻게 손으로 그렸나 싶다. 그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림을 생각해야 하는데 좁은 책상에서 이렇게 큰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그리다 보면 먹물 한 방울 튀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지, 기와집 그릴 때 누구처럼 기왓장 헤아려가며 그리는 건지.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물어봐야 좋은 대답은 안 나오고 구박이나 받을 것 같아 아예 물어볼 생각도 안 했다.


그는 그림마다 꼭 자기 흔적을 남긴다. 일부러 찾아봐야 보일 만큼 아주 작게 자기의 분신을 그려 넣는다. 때로는 가방 멘 아이로, 때로는 빌딩 숲을 바라보는 갓 쓴 양반으로, 가끔은 소 등에 올라타고 피리 부는 목동으로, 부용정 못에 낚싯대를 드린 강태공으로. 그러고 보니 지렁이도 있네.


그렇게 재미 들려 찾아보니 별별 인사가 다 있다. 등짝에 9X9를 써 붙인 이가 있어 누구냐고 물어보니 지금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등짝에 써 붙이고 다니는 모모 인사란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가 슬며시 그림에서 비키니 입은 아가씨 그림을 찾아보라더라. 설마 하니 그런 그림이 있을까 싶었는데, 있기는 있더라. 팔등신 미녀가 비키니 입고 누워있는 자태를 그렸더란 말이지. 안 믿어지면 직접 한 번 찾아보시라.


사실 오늘은 개막식보다 이상한 인종들이 자리 파하고 갖는 뒤풀이가 더 궁금했다. 그리고 글쟁이들의 그 자리에 말석 하나를 차지했다. 가문의 영광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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