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슬픔이 쉬운 사람들
2년 전에는 한 연구소의 인턴으로 있었다. 종교 관련 연구와 더불어 단행본과 월간지를 만드는 곳이었고, 나는 월간지팀에 소속돼 기자로 일했다. 내가 맡은 일은 취재 후 기사를 쓰거나 기고를 받아 글을 편집하는 일이었다. 기고문은 직접 쓴 글 말고 설교 원고도 더러 있었는데, 어느 날 원고를 편집하다 엉엉 울고 말았다.
한 대형 교회의 중고등부 설교문이었다. 제목은 '빵셔틀아, 일진의 뺨을 날려라!' 빵셔틀이라니. 실제로 빵셔틀이거나 되어 본 적 있던 아이가 이 교회에 와서 주보에 적힌 이 설교 제목을 봤더라면 흠칫 놀랐겠다는 걱정을 하며 원고 파일을 열었다.
「오늘 행복한 주일입니다. 이 행복한 주일에 안 행복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빵셔틀'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몇몇 분들의 눈이 불안한 것을 봅니다. 빵셔틀은 신조어죠. 네이버 국어사전에 의하면, '빵셔틀은 중고등학교에서 힘센 학생들의 강요에 의해 빵이나 담배 등을 대신 사 주는 행위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을 뜻하는 대한민국의 신조어로, 학교 폭력을 배경으로 탄생한 용어'입니다. 빵셔틀을 시키는 애들이 바로 '일진'이라는 애들이죠. 그럼 혹시 여기 '일진' 있나요? 역시 몇몇 분들의 눈빛이 불안하네요.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이 뭐죠? '빵셔틀아, 일진의 뺨을 날려라!'입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언제 가능할까요? 바로 빵셔틀을 괴롭히는 일진보다 더 강한 일진이 빵셔틀을 보호해 주면 가능합니다.」
가장 첫 문단에 이런 아득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아, 불행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를 않는구나. 더 읽지 못하고 원고를 닫았다. 아무렇지 않게 학교 폭력 피해 사실을 묻고 불안한 눈빛을 지적하는 말, 폭력을 폭력으로 응수해야만 벗어날 수 있다는 말. 모든 것이 무자비했다. 제발 사람들의 삶을 좀 이해하세요. 세상을 읽으세요. 당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제발 좀 발전시키세요.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따져 들고 싶었다.
'빵셔틀'이라는 단어를 다 빼고 싶고, 그에 따라 제목도 수정하고 싶다고 사수에게 물었더니 최대한 살리라고 했다. 원고를 편집하려면 전문을 네다섯 번씩은 읽어야 하는데, 한 번씩 두 번씩 글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한 번씩 두 번씩 죽는 느낌이었다. 이 글을 대체 어떻게 손봐야 하는지 혼자 고민하고 싸우다 다섯 번째쯤 읽었을 때는 더 이상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힘들 것 같아 화장실로 도망쳤다. 좀 진정하고 돌아온 후 사수에게 우려되는 지점을 이야기하며 아무래도 수정하는 게 좋겠다고 다시 말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알아서 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편집권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였다.
편집한 원고를 겨우 넘긴 후, 밖으로 나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토해냈다.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 나 여기서 일 못 하겠어. 근데 내가 여기서 일 안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 타인의 슬픔이 이렇게 가벼운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어떤 아이가 어느 날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교회 나왔다가 이 설교를 들었으면 어떡하지. 그 아이가 그래도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일이 죽음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세상은 여전하고, 슬픔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