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인석 Nov 15. 2021

샤라웃, 토마스 뮐러

TEXTIST PROJECT

[장면1] 카잔

 역대급 이변이 일어났던 2018년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F조 경기. 90분을 넘긴 추가시간조차 한참 지난 시간. 김영권 선수의 골을 먹고 얼빠진 독일 선수들 사이에서, 단 한 명의 선수만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심판에게 손목을 끊임없이 가리켰다. 시간을 고려해 달라는 강력한 어필. 이미 전광판의 시계가 멈춘 상황. 추가시간의 추가시간을 고려한다는 심판의 제스처에 다른 선수들을 독려했던 선수.


[장면2] 미네이랑

 그보다 4년 전,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컵. 영원한 우승 후보이면서도 개최국 어드밴티지까지 안고 있는 브라질을 4강에서 만난 건 독일. 코너킥으로 올라오는 공을, 한 선수가 수비 뒷 공간으로 재빠르게 빠져나와 첫 번째 골로 만들었다.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강력한 홈 어드밴티지를 보란 듯 짓이겨버린 독일은 무려 일곱골을 넣으며 개최국에 참극을 선사했다. 그 중심에는 '공간연주자(Raumdeuter)'라는 별명을 가진, 첫 골을 넣은 선수가 있었다. 


[장면3] 리스본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은 여파는 축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기장에 관중은 없었다. 하지만 2020년 8월의 FC바르셀로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경기 중, 가장 기대를 모았던 제 3경기.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의 맞대결은 '미리보는 결승전'으로 점쳐졌다. 뚜껑을 열자 대반전이 일어났다. 메시와 수아레스는 제대로 반항조차 못한 채, 한없이 두드려 맞았다. 휘슬이 울린 후 전광판에 비춰진 점수는 8대2. 경기의 MOM은 공간 조율 뿐 아니라 2골과 1어시스트까지 해낸 선수에게 돌아갔다. 


 세 장면의 선수는 모두 이 글의 제목처럼 '토마스 뮐러'다. 오랫동안 꾸준하고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독일 국가 대표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미 A매치 100경기도 훌쩍 넘겼다. 또한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세계 최강팀의 원클럽맨이자 붙박이 주전으로 2008년부터 흔들림없이 뛰고 있다. 


 소위 '축빠'라고 불리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가 "어떤 축구 선수를 제일 좋아합니까?"일 것이다. 어려운 질문인 이유는, 첫째로 누구 한 명을 꼽을 수가 없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질문자가 누구냐에 따라 인지도가 떨어지는 선수는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에는 '적당히 알만한' 선수를 말하고 넘어가는게 편한 일이다. 가령 손흥민이나 박지성, 메시나 베컴, 호나우딩요 같은 선수들 말이다. 한국인 질문자 한정으로 '호날두'라는 대답을 할 수 없게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만약 내가 '알폰소 데이비스'나 '은골로 캉테', '트렌드 알렉산더 아놀드' 같은 이름을 답한다면, 축구에 문외한이면서 예의상 물어본 사람에게는 지루한 대화가 이어질 수 밖에. "그게 누구에요?"라는 질문이 돌아올 거고, 그러면 나는 "비록 체구는 작지만 첼시의 중원을 담당하면서도 헌신적인 플레이로 사랑받는 선수에요. 귀요미 기믹도 있어서 인기가 많죠. 프랑스 국가 대표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선수에요."라는, 별로 관심없을 대답을 또 이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웬만해서 '토마스 뮐러'라는 대답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뮐러는 내가 좋아하는 수 많은 축구 선수들 중 어쩌면 내가 지향하는 삶의 자세를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가 아닐까 싶다. 


 토마스 뮐러라는 이름과 성은 독일에서 매우 흔한 이름과 매우 흔한 성의 조합이다. 그래서 한국 팬들에게는 '김철수'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다. 재밌게도 그의 플레이스타일은 이름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탑클래스 수준의 선수이지만 그는 결코 화려한 선수는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화려한 선수는 뛰어난 발재간과 개인기, 멋진 골을 보여주는 (호날두를 포함해서) 메시나 네이마르, 더 과거로 가면 지단이나 앙리 같은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뮐러가 있는 경기와 없는 경기는 품질 차이가 극심하다. 엄청나게 많은 활동량(박지성과도 비슷하다)을 토대로 헉 소리가 나오게 하는 창의적인 패스, 무엇보다도 공이 없을 때 수비수들을 약올리듯 속이며 빈 공간으로 빠져나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버리는 움직임은 '공 없이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티에리 앙리는 이런 말도 했다. 

 "화려한 개인기? 그런 게 축구가 아니다. 뮐러가 하는 게 바로 축구다."


 피파나 위닝같은 축구 게임을 하면 뮐러를 잘 쓰지 않게 된다. 축구 게임은 개인기나 속력 같은 개인 역량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이런 개별 스탯이 높은 선수를 사용해야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다. 뮐러가 '진짜 축구'에서 해내는 마법같은 움직임과 '공간 창조'를 게임에선 구현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게임에서 뮐러를 쓰면 그저 그런 선수 중 하나로 느껴질 뿐이다. 게임에서 구현 불가능한 레벨의 축구를 하는 선수가 바로 뮐러라는 의미다.


 [장면2]에서 상술한 공간연주자라는 별명은 그런 그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호칭이자 찬사다. 공격수가 공격 진영을 보며 경기를 펼쳐 나가고, 미드필더가 중원을 보며 경기를 펼쳐 나간다. 수비는 수비라인을 보며 경기를 펼치고, 골키퍼는 최종 라인과 골대를 지킨다. 하지만 뮐러는 아예 경기장 전체를 보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선수다. 같이 뛰고 있는 스물 한 명의 선수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더 상위 수준의 축구를 구상하고 스스로 왕성하게 움직이며 실천한다. 

 무엇보다도 뮐러는 축구에 진심이다. [장면1]에서처럼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하건 목숨을 건 검투사처럼 경기한다. 그리고 축구는 '열 한 명'이 뛰는 게임이라는 걸 항상 인지하고 있다. 자기 분야에 모든 걸 불사를 정도의 진심과 현장에 직접 존재하면서도 버드 뷰를 볼 수 있는 시야. 


 뮐러가 보여주는 축구를, 삶에 대입해서 실천하고 싶다는 다짐을 항상 하게 되는 이유다. 스스로 화려하진 못하더라도, 성실하고 준수한 움직임, 결정적으로 코 앞의 공이 아니라 경기장 전체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수 많은 트로피가 쌓여있을 수 밖에 없다. 내 존재에 대해 나보다도 주변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뮐러를 shout out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뮐러는 여전히 현역이고, 끊임없이 그가 쓴 역사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장난질의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