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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l 31. 2022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책을 편다

TEXTIST PROJECT

1.

 소설을 한창 좋아하던 때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집어먹었다. '먹었다'라는 말이 적당하다. 닥치는대로 먹었다. 서점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있는 베스트셀러부터 먼지 쌓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꽂혀있는 비인기 소설들까지. 

 책이란 읽는 양보다 출간되는 양이 항상 훨씬 많아서 내가 아무리 많이 먹는다고 해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해도 대화의 접점은 잡히기 어렵다. 영화와 다르다. 


 대략 병원 생활을 마친 후부터 소설고르는 혓바닥이 바뀌었다. 한 순간에 까다로워진건 아니다. 서서히 불편함을 느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 소설 하나를 읽어도 아무 책이나 맛있게 먹어 치우던 때와는 다르게 끝맛도 텁텁하고 개운치 않음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읽는 소설의 범위는 줄어들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읽는 양 자체가 많이 줄었고, 어쩌다 읽어도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왜 그럴까를 곰곰히 걸으며 생각해봤다. 나는 왜 새로운 소설을 펼쳐 들기 힘들어 하는가. 


2.

 드라마 '펜트하우스'를 보면서 어느 정도 깨달았다. 피카레스크의 정점을 보여준 이 드라마는 배우들의 찰진 연기력 때문에 보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회차를 거듭할 수록 시청률은 올랐고, 그렇게 드라마는 시즌3까지 릴리즈됐다. 나는 시즌2 언젠가부터 드라마를 제대로 보길 포기했다. 조금 과장하면 겁이 났다. 선한 자는 아무도 없고 악당들만 날아다니는 저 세계관 속에서, 이번 회차를 본다고 한들 산뜻한 해소감정을 느끼며 시청이 끝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작가나 편집진, 연기자들은 악역만 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통쾌함을 선사하려 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한여름에 롱패딩을 입고 땡볕에 나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딘가 가려워서 긁는데, 어디가 가려운지 모르겠고, 긁은 자리는 상처가 남는 그런 느낌. 


 김영하 작가의 신작을 구입했다. 그런데 한 달이 되도록 아직 책의 1페이지도 펴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서로 죽이고 오해하고 불륜하고 치고 박고 할까봐 겁난다. 나는 어떤 이야기든 그 속에 과하게 몰입하고 만다. 이런 맞고 때리고 죽이고 배신하는 이야기 속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다보니 드라마도 소설도 영화도 괜히 함부로 시작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3.

 잔인함의 문제는 아니다. 차라리 조금 잔인하더라도 결말이 확실히 시원하거나, 뻔하더라도 권선징악의 요소가 들어가면 해소라도 된다. 범죄도시2를 볼 때가 그랬다. 악역과 선역은 명확하고, 내가 몰입할 대상은 당연히 선역이었다. 평론가들은 이런 작품을 '클리셰'라거나 '예술성은 없다'고 평한다. 나는 예술성이 떨어지는 대중일까. 


 기생충이 개봉했을 때, 시놉시스나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영화관에 가는 걸 미뤄왔다. 엔딩크레딧이 올라올 때, 마음이 편할거 같지 않았다. 그렇게 기생충이 온갖 기록들을 갈아 치우고도 한참 후에야 결국 '꼭 봐야 하는 영화'임을 확인하고서야 영화를 봤다. 괜히 명작이 아니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빛났다. 그럼에도 영화 전체를 한 흐름에 다시 보려면 여전히 단단히 마음먹어야 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최근에 내가 재밌게 본 이야기는 뭘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도 재밌었지만, 완결된 지 한참이 지난 '용이산다'가 이야기 구조상 가장 좋아하고 편안하고 시원하게 본 웹툰이라고 생각한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 사실 사람이 아니라 용-그 드래곤 맞다-이라는 설정인 이 웹툰은 악역이 없다. 나는 항상 악역없이 재밌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용이산다는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적인 이야기에 가장 가깝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존재하면서도 자잘한 옴니버스식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붙어있는 구조가 마음에 든다. 아마 옴니버스식의 구성에 마음이 가는 성향 때문에 '우리들의 블루스'도 재밌게 본 듯하다.


4.

 왜 난 이제는 이야기를 통해 불안함과 불편함과 무서움과 절망감을 느끼고 싶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든 구체적인 어두움이 존재해야 더욱 현실적이고 기승전결이 확실할텐데 말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포털사이트 뉴스란을 보면 금방 답을 찾을 수 있다. 굳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간접경험을 하지 않아도, 현실 자체가 피카레스크다. 선한 자는 거의 없고, 모두가 절망적이며, 대부분이 악역이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은 이미 현실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던져지고 있다. 현실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불쾌함을 이야기 속에서나마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야기에서나마 악역없는 상쾌함을 선사받고 싶은 모양이다. 


 언젠가 다시 예전처럼 악역이 난무하는 이야기에도 타격감을 느끼지 않고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독자가 되고 싶다. 현실 속에서 악당을 찾아보기 어려워지면 자연스레 그리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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