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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Aug 22. 2022

교도소의 식사와 군대의 식사

TEXTIST PROJECT

 부동산 문제가 뉴스에 오르내릴 때면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또' 보이는 기사들이 있다. 바로 전세사기. 요는 몇백 채의 부동산을 가진 주인이 전세금을 떼어먹는 그런 행위다. 전세금을 1억이라고 단순 계산하고, 100채를 가진 집주인이 악의를 갖고 행위를 저지를 경우, 그 자는 100억의 이익을 편취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웬만한 기업의 1년 이익을 한 개인이 쉽게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개인의 악행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 전가하는 걸 나는 반대한다. 어딜가나 튀는 종자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을 전체로 일반화하는 것만큼 절대다수에게 억울한 일이 없다. 대다수의 집주인들은 적법하고 적절한 시세에 집을 제공한다. 

 화나는 포인트는 어차피 악인인 저 개개인들의 평면적 행위가 아니다. 이런 기사가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나온다는 반복성에 주목한다. 몇십억 몇백억을 쉽사리 빼돌리는 악당들은 왜 꾸준히 다시 등장할 수가 있는가? 나는 그 구조가 이해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한 사회에서 극소수의 악인이 등장하는 건 시스템의 책임이 아니지만, 그 악인이 똑같은 행태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건 시스템이 무책임하게 방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은행에 가서 10억을 빌린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잠적한다. 그러면 이 개인은 어떻게 되는가? 무슨 수가 있어도 잡힌다. 빼돌린 10억을 돌려주는 건 당연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까지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전세사기범들이 통쾌하게 처벌받았다는 기사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들은 항상 고자세고, 피해자들은 전세사기범을 잡아낸다고 하더라도 애걸복걸해서 전세금이나마 받아내면 감사해야하는 모순적인 세태가 반복될 뿐이다. 


 그러면 법은 왜 이들을 강력하게 처벌하지 못할까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300명의 국회의원 중 무주택자는 50명이다. 이들은 적어도 자신이 가진 자산에 매달려 있는 세입자가 없다. 배제한다. 나머지 250명 중 2주택 이상을 가진 국회의원은 88명이다. 88명 중 3주택 이상을 가진 다주택자는 16명이다. 

 정리하면 국민을 대표하는 300명의 표본 집단 중, 집을 가진 사람은 안 가진 사람보다 다섯 배가 많다. 또 집을 빌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집이 없는 사람보다 57%정도 많다. 단순 산술 비교이지만 수치는 그렇다.

 

 입법부에서 법안을 발의할 때, 조금이라도 세입자에게 피해를 주는 임대인을 처벌하는 법을 발의할 가능성보다는, 임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세입자를 처벌하는 법이 발의될 확률이 훨씬 높다고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국회의원들이 모두 품격있고 인격적이고 훌륭한 도덕성을 가진 300명만 모아 놨다고 가정하더라도, 당장 자신의 이권에 해가 되는 법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인간 본능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매번 돌아오는 전세사기 뉴스다. 누가 봐도 당연하고 강력하게 처벌되야 할 행위는 밋밋하게 처벌되거나 그 조차도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의감에 휩쌓인 국회의원이 날카롭고 단단하게 법을 만들었다가, 자기가 처벌당하게 되면 그만큼 민망하고 기분나쁠 일도 없을 것이다. 


 교도소의 식사와 군대의 식사를 비교했던 기사가 있었다. 교도소의 밥은 영양가가 높아 보였고, 군대의 식사는 부실해 보인다. 이런 일이 왜 생기는 걸까. 우스갯소리로 누군가는 말했다. '국회의원 중에 군대와 관련있는 사람보다 감옥과 관련있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를 웃음으로만 넘길 수 없는 씁쓸함이 남는다.


 가난해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책을 못 내는 것도 아니고,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고 군 관련 업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여자가 아니라고 여자를 위한 정책을 못 만들지 않고, 노인이 아니라고 노인 복지 정책을 구상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니다. 어린이가 아니라도 어린이를 위한 일을 할 수 있고, 청년이 아니라도 청년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 개인의 상황과 상충된 업무에서, 인간은 과연 발사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정의'라고만 정의할 수는 없다. 월급이 아깝다고 인원을 줄이라고 욕 먹는 국회의원의 수를 300명이나 유지하는 이유가 최대한 다양한 계층의 의견과 환경을 조금이라도 더 대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전세사기범에게 몇천, 몇억은 자신이 편취하고자 하는 금액의 1~2%밖에 안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세입자에게는 전재산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우리의 대표들은 어느 쪽을 더 대표할 것인가. 우리의 투표가 얼마나 적절하고 다양한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을 앉혔는가. 결과주의적 관점에서, 국민의 대표들은 아직 전세 사기범들의 강력한 처벌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진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게 국민의 뜻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앞으로는 저런 기사를 더 볼 수 없는 날이 오기를, 또는 저런 기사의 후속기사로 악당이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라는 기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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