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인석 Nov 03. 2022

누구도 읽지 않는 소설을 완성하는 일

TEXTIST PROJECT

 성공한 작가들께서는 소설의 맺음말에 '이 글을 쓰는동안 주인공과 늘 함께하는 감정이었다'는 류의 표현을 남기곤 한다. 멋들어지게 이 흉내를 내고 싶었다. 


 박성운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하진 못했다. 이 글을 구상한 시기는 언제인지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이고, 초고를 쓰기 시작한 시점도 명확하지 않다. 몇 주동안 온전히 내 모든 에너지를 투여해서 박성운씨의 이야기를 쓴 것도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천천히 조금씩 썼다. 


 박성운씨가 처음 나의 상상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후, 나는 특별하면서 여유로운 순간을 대면할 때마다 성운씨를 그 순간 속에 대입시키곤 했다. 성운씨가 마주하는 환경과 날씨, 밤하늘은 대부분 언젠가 나 스스로 마주했던 것들이다. 나는 성운씨가 행복한 사람이길 바랐다. 그랬기에 현실적인 설정들 속에서도 이상적이고 특별한 순간들을 양념처럼 삽입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계를 설정하고 그 세계를 구체적으로 쌓는 과정은, 솔직히 고되진 않다. 만약 내가 프로 작가, 선입금을 받는 작가였다면 고되었을 터다. 나는 그저 책과 글을 좋아하는 아무개일 뿐이다. 이야기를 만들어야할 어떤 책무도 없다. 마감도 완성도 전개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고되다고 한다면 엄살이다. 


 대신 외롭다.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 그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굳이 '외로운 싸움'이라고까지 표현할 것은 못된다. 열과 성을 다해 뼈를 깎아가며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 작가님들이 있기에, 나는 재밌는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싸움'이라는 표현은 그분들의 것이다.



 플랫폼에 게재를 시작했을 때, 이미 원고 자체는 원고지 500장을 훌쩍 넘는 분량으로 완성되어있던 상태다. 나는 이 원고를 그저 스스로 약속한 일정에 따라 수정만 조금 본 후 업로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교만이었고 무지였다. 


 초고와 완성본을 비교하면 거의 절반 이상은 뜯어고친 것처럼 차이가 크다. 있었다가 없어진 에피소드도 있고 없었는데 새로 쓰여진 에피소드도 있다.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볼륨을 늘린 에피소드도, 컴팩트하게 잘라낸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문장의 구성이나 형태는 대부분 고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초고를 연재본으로 업로드를 시작하면서, 초고를 쓸 때처럼 또다시 행복했다. 에피소드마다 차이는 있으나, 오래된 건 쓴지 1년이 훌쩍 지난 글도 있을테다. 나는 초고들을 다시 배열하고 짜맞추고 교정하면서, 초고를 쓸 시기와 연재본을 업로드하는 시기의 이격으로 인해 조금 희미해진 박성운씨의 방랑기를 다시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퇴고하고 업로드하면서 그의 옆에서 캠을 들고 다큐멘터리를 찍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문청으로 살아가는 일은 부끄럽다. 처음 소설 원고를 어딘가에 제출했을 때는 문청이라는 단어가 싱그러웠다. 에너지 넘치게 느껴졌다. 그걸 몇 년 반복하다보니 재능없음의 공인인증서처럼 여겨진다. 재능과 노력이 모두 부재함을 증명하는 듯하다. 글을 쓰는것은 고된 일이 아니지만 꿈을 꾸는건 때론 고되다. 대체 나는 언제까지 '아직'이라는 단어를 써야만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외롭게 또 뭔가를 썼다. 그동안은 어디서도 뽑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모르는 단편 소설을 썼다. 이제는 공개된 공간에 썼다는 점이 첫번째 다른 점이고, 중장편이라는게 두번째 다른 점이다. 여전히 읽히지 않는 글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또 나는 말을 비슷하게 반복한다. 읽히지 않는 글을 쓴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니다. 외로운 일이다. 창작자의 상상 속에서 벌어진 재밌는 일들을 보이는 세상으로 옮겨놓았는데, 타인에게는 그 세상이 그다지 재밌지 않다는 사실이 외롭다. 


 하지만 이것이 누적되고 반복되어, 읽히지 않는 글'만' 쓰는 창작자로 남는다면 그것은 외롭고 슬픈 일일 것이다. 나는 점점 슬픔의 영역으로 다가가는 걸까. 그럼 이제는 뭐든 그만 쓰는게 나 자신을 위해서 옳은 일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일단은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꿈틀대는 주인공들을 밖으로 꺼내고 싶다는 생각이 우선이다. 부족한 재능에도 끊임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유다. 



 이렇게 한 이야기의 갈무리가 끝났다. 환호성이 나온다거나 샴페인을 터트리고 싶다거나 하진 않다. 그저 이 긴 이야기를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어쨌든 완성은 했구나' 정도의 뿌듯함이다. 마침 이 글을 완성하는 그 순간 나는 혼자 있었고 뿌듯하면서도 헛헛한 이상한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서두에 말했든 나는 성운씨와 살을 맞대고 몇 달동안 지내거나 한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종종 소식 주고 받는, 경조사가 있으면 알려주는 정도의 사이인 것 같다. 둘만 있으면 꽤 어색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분명 나는 멀리서나마 성운씨를 좋아하는 사람임은 확실하다. 그랬기에 오랫동안 그를 떠올리며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썼을 것이다. 


 종종 성운씨가 보고싶을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글을 감상해야 한다. 이제 내가 나의 글을, 성운씨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아쉬운 글이 아닐 수 있도록 다듬는게, 아직도 문청일 뿐인 창작자의 숙제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아마 성운씨도 멀리서 흐뭇해하지 않을까.


https://brunch.co.kr/brunchbook/projectstar


작가의 이전글 교도소의 식사와 군대의 식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