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노숙자이며 방랑자이고, 나그네이자 자연인이면서, 과학자이자 백수인 생활이 딱 30일째. 별 관측은 이 생활이 흐른 날짜와 동일한 횟수만큼 진행되지는 못했다. 첫 관측에 성공하기까지도 일주일 가량의 실패가 필요했고, 그 후로도 날씨나 캠프 상황, 혹은 산 속에서의 생활이니만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상황으로 인해 관측 자체를 진행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은경은 그 스팟에 머물렀던 나흘동안 매일 저녁 별을 보러 찾아왔다. 이성과 매끄럽게 소통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손사레치며 막을 일도 아니었다. 솔직히 막고 싶지도 않았다.
그 캠프에서의 마지막 날, 은경에게 내일은 장소를 옮기겠다고 얘기했다.
"며칠동안, 예쁜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노트와 펜을 집어들고 귀퉁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은경은 산을 내려가기 전,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제서야 나흘만에 거의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쑥쓰러워하지 않고 응시할 수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가장 기억에 남을, 그런 악수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몰아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특별히 문제가 없다면 최대한 민통선과 가까운 위치까지 가보려 했다. 지도에 점찍어둔 다음 스팟은 민통선 안쪽에 있었다. 민통선 내부로의 진입과 그 안에서의 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슷한 위치 중 가장 북쪽이면서 지대가 괜찮은 자리를 잡을 작정이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가면서 한달의 생활을 머릿속에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한달은 회사생활에서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 생활을 시작한 후의 한달은 마치 꿈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그림처럼 눈 앞에 보여지기도 한다.
하늘과 별에 빠져드는 훌륭한 나날들부터, 천막조차 끙끙대며 잘 다루지 못하던 극초창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차 안에서 하릴없이 바깥만 바라보던 때. 맑은 산 공기에 적당한 햇빛을 맞으며 맡았던 커피 향. 먼지바람과 함께 마주했던 군인들. 밝고 당당한 미지의 여인 은경까지.
내가 지나온 한달은 어떤 한개의 간결한 단어로 결코 설명되지 않았다.
기록을 남기면서 그래도 헌사 한번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차 이야기이다.
이 생활을 준비할 때, 가장 클 것이라 예상했던 지출은 관측장비와 자동차였다. 관측장비는 망원경, 카메라를 비롯한 제반 기기들이었고, 학부 전공시절 알던 제품들이 한정되어 있었다보니 따로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자동차를 고를 때 생각해야할 요소가 많았다.
후보군에 올려놨던 차는 승합차인 C, 전기차인 I, 그리고 팰리세이드였다. 지금 고백하자면 솔직히 I를 가장 사고 싶었다. 차를 구매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야생에서의 생존. 그렇지만 막상 생애 첫 차를 처음 구매하기로 마음먹으니 주 목적 이외의 요소에도 마음이 흔들리게 되더라. 아무리 중고차라도, 첫 차 아닌가.
가령 좀 더 디자인이 예쁘다거나, 옵션이 많거나, 특색있거나, 고급 브랜드이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나마 이성의 끈을 붙잡았기에 딱 저 세 후보군까지 추릴 수가 있었다. 아무리 '움직이는 집이자, 관측 기지 역할을 해줄 수단이 필요하다!'라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독이더라도 외제차 매장을 가보고 싶은 마음까지 없애는건 쉽지 않다. 매장에서 구경만 하고 안살 수도 있겠지만, 막상 직접 매장에 가본 뒤에는 이성까지 놓치게 될 것 같아서 아예 후보군에서 제외해 버렸다.
어쨌든 중고 팰리세이드를 선택했다.
중고차 매장에서 갑작스레 구매 결승전 상대로 등장한, 후보에 없었던 레이와 팰리세이드를 경쟁선상에 놓고 다각도에서 구매 조건을 판단해본 끝에 결국 도출된 결과다.
I는 세 종류의 차 중 가장 예쁘고 가장 트렌디했다. 또 전기차이기도 했기에, 각종 전자장비를 써야하는 내 입장에서는 커다란 충전기 역할로도 활용할 수 있었으리라. I를 포기한 이유는 전기차라는 장점만큼 단점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 나의 생활은 기온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울에서는 전기차 충전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나의 생활동안 전기차 충전이 가능한 곳 위주로 돌아다닐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실제로 이 생활동안 전기차 충전소가 눈에 띄었던 적은 손에 꼽는다. I는 그렇게 빗금이 그어졌다.
장기간의 캠핑 생활을 위해선, 슬라이드 도어를 가지고 있는 승합차 C가 제일 합리적이었다. 팰리세이드와 C는 마지막까지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각축전을 벌였다. 합리성, 효율성, 생활 편의성, 그 어떤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C를 선택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팰리세이드를 선택했다. 선택의 결정적인 이유는 '나의 젊음' 때문.
그라운드 룰에서조차 '등산복은 입지 않기'를 단서로 넣을 정도로, 나는 나의 연령대에 민감한 마음으로 이 생활을 준비했다. 그래서 C는 마치 '젊은 아빠'이거나, 혹은 그 상태를 준비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편견일 수 있지만, 직관적으로 느낀 생각은 그랬다. 물론 팰리세이드도 '청년' 느낌의 차는 절대 아니었지만, C와는 또 달랐다.
아, 이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왜 중고차로 샀는가.
당연히 비용 절감의 목적이 제일 컸다. 중고차와 신차의 가격이 천만원만 차이난다고 해도, 그 정도의 돈이면 떠돌이 생활에는 굉장한 자본이다. 하지만 중고차를 선택한 더 큰 이유는 당장 차를 받을 수 있느냐였다. 요즘은 웬만해선 몇달 이상 기다려야 신차를 받는다고 하더라. 떠나야겠다는 마음가짐을 200% 충전해두어도, 차가 없다는 이유로 떠나지 못하면 어영부영하다가 주저않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금 내 눈 앞에 흰색 팰리세이드가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한모금 넘겼다. 고맙게도 잔고장 없이 험지 생활을 견뎌주고 있다. 여기저기 많이 긁히긴 했지만.
계획대로면 이 생활은 겨울이 다가오기 직전에 끝난다. 글쎄, 이 생활이 끝난다고 굳이 이 녀석을 처분할 것 같진 않다. 한달동안 정이 든 느낌이다.
해는 이제 가장 높은 위치를 지나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슬슬 저녁 먹을 거리를 준비해야 될 것 같다. 트렁크에서 요깃거리를 꺼냈다. 닫고 돌아서다가 문득 차체를 토닥이듯 툭툭 두드렸다.
생활과 생존을 위한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어 고맙다. 남은 70일,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