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안 한쪽 구석에는 깨끗이 닦인 선풍기 날들이 모여있었다. 또 선풍기 덮개들이 그 옆에 수두룩하게 쌓여있었고, 에어컨 덮개도 놓여 있었다. 신부는 변명하듯 말했다.
"여름지나고 이렇게 안씻어놓으면 이게 선풍기가 아니라 먼지풍기가 되거든요. 젊은 분들 오시는 곳이면 괜찮은데, 안그래도 어르신들은 기관지 안좋으신 분들도 많으니까.. 그래봐야 여기 오시는 분들은 몇 분 안되긴 하지만.."
신부와 나는 각자 벽 쪽에 붙어있는 빈 선풍기에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날은 많이 선선해져 있었지만, 왔다갔다 하니 이내 금방 더워졌다. 날개를 끼운 선풍기를 덮개로 덮었다. 이제 선풍기들은 다음 여름까지 휴무에 들어갈 것이다.
선풍기와 에어컨의 덮개를 씌운 뒤에는 성전 안의 긴 의자 몇 개를 빈터로 옮겼다.
나무가 삭아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하고, 언제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의자들이었다. 신부와 양쪽에서 들어 옮겼는데, 문득 그동안은 신부 혼자 어떻게 옮겼을지 궁금해졌다. 신부가 답하길 "한 쪽다리에 수건을 깔고 반대쪽에서 들어서 밀며 옮겼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몇 개는 도리어 더 바스라져서 아예 수리조차 못하게 되기도 했다고 신부는 웃으며 말했다.
빈 터로 의자를 옮겨놓은 뒤에는, 다시 그 빈 터에서 고쳐진 의자들을 성전 안으로 옮겼다.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몇가지 일이 끝나자 신부는 작은 건물의 화장실 반대편 문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은 마치 작은 거실처럼 보였는데, 부엌과 냉장고, 소파도 있었다. 신부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었다. 주스는 시원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덕분에 진짜 일이 빨리 끝났네요. 다음 강론에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여기는 무슨 회관같네요?"
"예. 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미사 끝나시면 여기 모여서 TV도 보시고 화투도 치시고 가끔씩은 식사도 나눠서 하시고 그럽니다. 혹시 이런거 가져가면 좀 필요하실까요?"
신부는 열 개씩 포장되어있는 반찬용 조미김 팩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내가 수긍이나 거절의 대답을 하기 전에 신부는 황급히 물었다.
"아니, 그보다. 그러면 지금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시는지..?"
나는 지금 캠프의 위치를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대강 어떤 산을 어떻게 넘어왔는지를 설명했다. 신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음.. 형제님의 촬영 계획이 어떤지를 몰라서 이렇게 권하는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여기서 며칠 계시는건 어떠세요?"
신부는 대답을 듣지 않고 손짓으로 나를 따라오라고 하더니 다락처럼 보이는 계단으로 안내했다. 올라가자마자 문이 보였는데, 문을 열자 다락방이 아니라 옥상이 나타났다. 옥상은 깨끗했고 접혀있는 파라솔과 의자들도 놓여있었다.
"여기가 할머님들 앉아서 바람쐬시는 곳이에요. 뭐 무릎때문에 잘 안올라오시긴 하지만. 어떻게 촬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망원경 놓고 하시면 편하시지 않을까요?"
말할게 뭐 있나. 당연히 이런 장소가 있다면 천문대나 다름없다. 호텔보다 좋다. 호텔은 편하긴 하지만 주변에 불빛과 사람이 많아서 별을 찍기 어렵다. 이정도 제안은 내가 숙박비를 내고라도 내가 먼저 부탁해야 맞는 상황처럼 보인다.
"저.. 신부님. 너무 감사한 말씀인데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저는 신자도 아닌데.. 여기 뭐 집기류도 많은데.. 신부님 같이 지내기 불편한거 아니실런지.."
신부는 웃으며 말했다.
"같이 지내긴요. 저는 저 있는 본당으로 돌아가야죠. 이번주 토요일에나 다시 여기 올텐데요 뭘."
귀를 의심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여기 있으라고?
나는 방 안을 쭉 둘러봤다.
"아니, 신부님. 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뭘 어떤 사람이에요. 그냥 사람이죠. 이런 오지 산골에서 잡일 도와줄 사람을 만나는게 쉬운 일일까. 형제님이 편하면 계셔도 된다는 겁니다."
감사를 넘어서 황송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휴. 감사합니다. 신부님. 깨끗이 있을게요."
신부는 방 안을 돌며 각종 집기류의 위치와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보일러 스위치의 위치와 온수 작동법을 알려줄 때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물을 찾으며 산을 넘다가 의자 몇 개 옮기고는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아, 그리고 이쪽에는 세탁기가 있는데.. 할머님들이 쓰시는 곳이다보니.. 건조기는 없어요. 이것도 쓰시면 되고, 말릴 때는 아까 저 옥상에 한쪽 구석에 보면 접혀있는 건조대 있거든요. 그거 펴서 쓰시면 됩니다."
신부는 몇 가지를 더 안내해주고는 나를 데리고 아예 성당 터 밖으로 나갔다. 그는 가장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
"엄니!"
한 노인이 텃밭에서 파를 뽑다가 허리를 폈다.
"아, 신부님 오셨수."
"예, 엄니. 엄니, 여기 공소 회관에서 이 형제님이 며칠 계실건데, 혹시 신자분들 왔다갔다 할 때 좀 조심하시도록 엄니가 좀 사람들에게 알려주소."
"암."
할머니는 내 쪽으로 눈을 마주쳤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저.. 아, 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는 뭔 신세. 우리 집도 아닌 것을. 신부님, 거기 회관 냉장고에 찬이 좀 있는감요?"
"글씨. 안 열어봤는데."
할머니는 마치 날듯이 집으로 홱 들어가더니 금새 락앤락 통을 내게 건냈다.
"김친데. 맛이 있을란가 모르겠소?"
나는 어찌 할 줄 모른채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신부와 나는 '엄니'에게 인사를 한 후 다시 공소로 돌아왔다.
"차는 여기 대시면 되고 편하게 계세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거기 방 안에 달력에 주임신부 전화번호 있으니깐 거기로 거시면 되고요."
신부는 그렇게 말하더니 훌훌 떠나갔다. 나는 방을 쭉 둘러보고는 황홀한 마음으로 원래의 캠프로 돌아가 자리를 철수한 후 차를 가지고 공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