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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an 11. 2023

개발자의 키보드

TEXTIST PROJECT

1.

 개발자들은 키보드에 진심이다. 사무실 복도를 지나며 눈에 보이는 자리들의 키보드는 제각각이다. 각 자리의 키보드들은 결코 컴퓨터를 구매하면 번들로 딸려오거나 총무부서에서 일괄 구매한 관계사의 제품인 경우가 없다. 수 십만 원에 달하는 상당한 고가의 키보드도, 개발자가 거의 대부분인 이 회사의 사무실에서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루 여덟 시간 이상씩 검정 화면과 씨름하는 장인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키보드는 전쟁터의 무기다. 존 윅의 총이고, 여포의 방천화극이다. 오비완 케노비의 광선검이고, 타노스의 건틀렛이다. 


2.

 키보드만 봐도 자리 주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만 원짜리 키보드도 항상 자리를 비울 때면 수건이나 뚜껑을 덮어놓는 자리도 있다. 하지만 수십만 원짜리 키보드임에도 아무렇게나 때가 묻어있는 채로 사용되는 자리도 있다. 


 누군가의 키보드는 거의 누렇게 변색된 8~90년대의 키보드다. 이 자리의 주인은 당시 키보드의 키감을 살릴만한 제품을 찾지 못해서 어렵게 그 키보드를 구해 사무실에서 사용 중이다. USB 포트도 없는 모델인지라 변환기가 따로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분홍색 키보드 자리도 있다. 이 키보드의 자리는 장패드도 분홍색, 방석도 분홍색, 자리에 놓여있는 거울도 분홍색이다. 키보드는 그냥 대중적인 가격대의 모델. 축은 적축이다. 물론 마우스도 분홍색이다. 


 수십만 원 키보드 자리는 컴덕의 냄새가 풀풀 난다. 마우스도 십수만짜리 고가의 모델이다. 이 자리의 주인은 모니터도 회사에서 제공하는 모델이 아닌, 직접 구매한 제품을 쓴다. 책꽂이 한켠에 미니 키보드가 하나 따로 세워져 있다. 아마도 휴대폰이나 태블릿에 연결하는 용도로 보인다.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자리도 재밌다. 이 자리의 키보드는 숫자패드가 없는 모델인 데다가 F1, F2등이 있는 제일 윗줄 패드도 없다. 자리가 키보드를 따라가듯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말고는 자리가 깨끗하다. 본체나 노트북도 어딘가로 보이지 않게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다. 


 자리마다의 키보드 얘기를 하면 끝도 없다. 번쩍번쩍 항상 LED가 제 몸짓 자랑을 하고 있는 키보드도 있고, 구형 타자기 형태의 키보드도 보인다. 혹은 레고블록 형태의 색감과 모양의 키보드도 있고, 아예 키보드 없이 노트북 자체의 자판을 쓰는 자리도 있다. 개발자들은 어쨌든 이 키보드라는 무기로 매일매일의 장인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3.

 얘기 나온 김에 내 키보드도 좀 자랑해 본다. 나는 개발자는 아니지만, 하루 여덟 시간 이상씩 키보드를 쥐고 있어야 한다는 속성은 개발자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나는 집에서도 이렇게 키보드로 항상 뭔가를 쓰고 있는 편이니 족히 열 시간 넘게 잡고 있어야 하는 무기라고 봐도 무방할 터다. 


 사무실 내 자리의 키보드는 무선 USB 인식이 되는 기계식 키보드이다. 펑션 버튼이 왼쪽에 부가적으로 여섯 개가 더 달려 있어서 필요한 결제창들을 좀 더 빠르게 불러올 수 있고, 엑셀에선 커스터마이징 된 수식을 빠르게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키보드의 가장 좋은 점은 블루투스 연결도 된다는 점이다. 블루투스 버튼을 누르면 휴대폰에 키보드를 사용할 수 있다. 컴퓨터에 타이핑을 했다가 휴대폰에 했다가를 쉽게 전환할 수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집의 키보드는 좀 더 나에게 맞춰져 있다. 무려 4개의 기기에 연결할 수 있다. 나는 집에서 3대의 노트북과 1대의 데스크탑을 쓰고 있는데, 이 키보드 하나면 모든 장비를 한 번에 통제할 수 있다. 흰색의 깔끔한 디자인의 이 키보드는 극강의 미니멀한 키 배열을 갖추고 있다. 87키보다도 열아홉 개의 키가 모자란 68키 제품이다. 이 키보드로 나는 올해 두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중편소설을 썼고, 몇 편인지 세보지 않은 에세이와 블로그를 썼다. 


4.

 장인은 무기를 탓하지 않는다. 좋은 개발자는 번들로 딸려오는 고물 키보드로도 탑급 코드를 작성할 것이고, 좋은 작가는 문구점에서 구매한 만 원짜리 키보드로도 명문을 만들어낼 것이다. 김훈 작가는 컴퓨터조차 쓰지 않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좋은 무기를 마련해 놓고, 그 무기로 싸우는 느낌은 아무거나 들고 싸우는 것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오롯이 나에게만 맞는, 마치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은 무기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싸워나간다는 느낌 때문에 많은 미생들이 각자의 형태로 오늘도 자기 몸에 쏙 맞는 칼을 갈고 휘두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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