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IST PROJECT
1.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홀을 지나 자동문이 열리면 사무공간이라 불리는 흰색과 회색, 베이지색과 유리색이 조화된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나의 일터는 한 층에 몇백 개의 책상이 있고, 열댓 개의 회의실이 있으며, 대여섯 개의 임원석이 있는 공간이다. 이 건물은 11층짜리고, 사무공간으로 쓰이지 않는 층들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일곱 층 정도는 이런 비슷한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또 이런 건물이 여섯 개가 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정리하면 아무리 못해도 수백 석의 책상과 열댓 개의 회의실, 대여섯 개의 임원석을 가진 사무공간에 7~8 정도를 곱하고, 또 거기에 6을 곱한 만큼의 동일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각 층이 어떤 업무를 맡고 있느냐에 따라 책상들의 배치나 회의실, 임원석의 구조는 다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많은 책상들과 회의실, 임원석이 존재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사무공간에 있는 책상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재보았다. 가로는 160cm, 세로는 80cm이었다. 이렇게 같은 크기의 책상 수백 개가 모든 층에 있고, 또 모든 건물에 있다. 완벽히 일치하진 않더라도, 이 공간에 왔다 갔다 하는 회사원의 숫자는 책상의 개수와 비례할 것이다.
이렇게 곱하기 수백, 곱하기 칠, 곱하기 육을 하다 보면 오피스 프로그램에서처럼 컨트롤 씨와 컨트롤 브이를 공간에 맞춰서 눌렀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사무공간 안에 들어와서 각 책상이 나열되어 있는 복도를 쭈욱 지나가보면, 개개인의 책상을 결코 컨트롤 씨와 브이로 규정할 수 없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똑같은 크기의 책상은 비어있는 책상을 제외하고는 단 한 개도 같은 모양으로 정리되어 있는 곳이 없다.
2.
단순히 누군가의 책상은 정리가 잘 되어 있지만, 누군가의 책상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이 아니다. 160 x 80이라는 공간 안에 책상은 그 주인의 정체성을 열심히 담고 있다. 똑같음을 권유받는 회사라는 조직에서, 규정된 공간만을 할애받았지만, 막상 그 넓지 않은 딱 그 공간만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다. 그 위에 무엇을 올려놓고, 어떻게 정리하고는 책상의 주인에게 달렸다. 책상을 가려놓을 수 있는 뚜껑이 있거나 덮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각자의 책상은 각자만 건들 수 있다. 훤히 뚫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임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무공간의 책상은 조직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정형화된 모양으로 살아가야 하는 각각의 회사원이, 최소한의 개성을 남겨놓을 수 있는 마지노선임이 틀림없다.
3.
나는 명함이 가지고 있는 간결함과 무거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명함과 책상은 특정 시스템 안에 개개인이 놓여있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부여자가 동일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축약과 배제를 거듭하여 불필요한 정보를 깎고 깎고 또 깎아서, 마지막 남은 가장 필요한 정보만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명함과 달리, 책상은 그것이 사무공간에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 위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책상의 주인에게 달렸다. 스케치북과도 같다.
그래서 복도를 한번 찬찬히 쭉 돌아보면 정말 각양각색의 스케치북이 눈앞에 펼쳐진다. 누군가의 책상은 딱 키보드 앞과 마우스 앞에 손을 움직일 공간을 제외하면, 컵 하나 놔둘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다. 수권의 참고 서적이 위태롭게 쌓여있고, 몇 개의 빈 종이컵과 플라스틱 컵이 커피를 1/4쯤 남겨놓은 채로 산개되어 있다. 달력과 여러 메모들이 혼란스럽게 놓여있고, 펜도 이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 컴퓨터는 켜져 있는데 검정 화면에 흰 글씨가 주인이 없어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반대로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책상도 있다. 노트북은 '주인 말고는 열지 마라'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것처럼 덮여있고, 그 옆에 화면이 꺼진 모니터가 마치 각도까지 고려한 듯 노트북의 수비병인 것 마냥 지키고 있다. 이런 자리는 선 정리조차 깔끔해서 노트북과 모니터에 연결된 선이 철저히 묶인 채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내려가 있다. 키보드와 마우스는 책상의 선에 맞춰서 제 위치에 놓여 있고, 책상에는 커버가 덮인 노트 말고는 어떤 것도 눕혀있는 사무용품이 없다.
누군가의 책상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가족사진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깨끗하게 서있고, 아들 혹은 딸이 어버이날이나 생일즈음에 썼을 법한 삐뚤빼뚤한 편지가 그 옆에 같이 붙어있다. 정리 상태가 어지럽더라도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 사진과 편지는 어느 각도에서건 가장 눈에 띄도록 배열된 책상이다.
스스로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그대로 드러나는 책상도 있다. 이 책상은 아예 책상 1/4 정도의 공간에 약통과 건강식품이 빼곡하다. 종합비타민이나 자양강장제부터 홍삼, 루테인, 오메가, 꿀에 각종 영어로 쓰여 있는 알 수 없는 제품들까지 정렬되어 있다. 책상의 주인은 헬스까지도 철저히 하는 모양인지 작은 아령과 악력기도 책상 오른쪽 구석에 놓여있고, 당연하다는 듯 헬스용 보충제까지 자리 잡고 있다.
책상 하나하나 설명하다 보면 이 글은 100페이지도 모자랄 것이다. 누군가의 책상에는 머리빗과 거울이, 누군가의 책상에는 각종 전자기기들이, 누군가의 책상에는 남들보다 두 개는 더 많은 모니터가, 누군가의 책상에는 거의 여섯 개는 되어 보이는 키보드들이, 누군가의 책상에는 젠가 게임처럼 쌓여있는 책들이, 누군가의 책상에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아무것도 없기까지. 수백 개의 책상에는 수백 개의 정체성이 160 x 80을 채우고 있다.
4.
이렇게 천차만별의 책상에서 모두는 각자의 치열한 전쟁을 벌인다. 책상에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이 각양각색일지라도, 그들에게 책상을 제공한 시스템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싸운다는 점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개인의 물리적 전장은 160 x 80에 한정된다. 하지만 책상의 주인들이 치르는 전투의 양과 깊이는 무한정이다.
다시 내 책상으로 돌아온다. 오른쪽에는 노트북, 왼쪽에는 모니터가 거치되어 있고, 계산기와 다이어리, 메모장이 정렬되어 있는 전장이 나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