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의 단편집
“이봐, 최 과장아. 너 혹시 익명게시판 안보냐?”
“그거 볼 시간에 코드 한 줄 더 짜는 게 낫죠. 별 얘기도 없더만요.”
“너 오늘부터라도 그거 좀 봐라.”
“차장님, 전에 몇 번 본 적 있거든요? 철없는 직원들이 앓는 소리나 하는 공간이더라고요. 시간 낭비 같아서... 그런 걸 뭐하러 봅니까?”
차장은 혀를 차며 말했다.
“야, 이젠 말하는 투도 고치고 해야 되는, 그런 시대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야기하는 차장의 말을 풀어보면 이랬다.
익명게시판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말을 함부로 하거나 앞뒤 꽉 막힌 직원들에 대한 성토가 줄을 잇는다고 했다. 관행처럼 여겨졌던 상급자와 하급자의 수직적인 관계가 IT 회사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꾸준히 나온다고 했다. 돌리고 돌려서 말했지만 결국 그런 성토의 대상이 나라는 의미였다.
사내 익명게시판이 생긴 건 세 달 전쯤이다.
젊은 직원들은 회사생활의 각종 응어리진 분노를 소셜 미디어에 쏟아내고 있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특정 이슈들은 상당한 파급력을 가졌고 언론이 주목할 정도였다. 명석한 경영진들은 다양한 대책을 내밀었다. 그 중 채택된 결론이 사내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익명게시판을 만들자는 방안이었다.
결과는 확실했다.
익명게시판이 생긴 후, 부당한 일들에 대한 폭로는 익명게시판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대로 소셜 미디어에서 폭로되던 회사의 부정적인 이야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회사 내에서만 접근 가능한 게시판이 그동안 소셜 미디어가 담당했던 배설 창구 역할을 대체했다.
“당나귀 귀!” 소리친 자를 색출하는 대신에, 아예 대나무 숲을 만들어 주고 벽을 둘러버린 묘안 덕에 다양한 분노들은 대부분 회사 내부에서 통제 가능하게 됐다. 직원들은 충분한 해소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경영진들은 회사의 문제가 언론에서 거론되기 전에 그들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엔 게시판에 올라오는 이야기가 당연히 남의 일이라 생각했다. 이야기들은 옹졸했다. 누가 반말을 하느니, 복장으로 지적을 하느니 같은, 아이들의 투정 같은 내용들 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내 게시판을 자연스레 보지 않게 됐다.
그러나 게시판이 생긴 뒤로는 확실히 젊은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짐을 느꼈다. 그들은 대담하게 덤벼들진 않았지만 예전처럼 소리 한번 빽 지르면 꼬리를 내리며 돌아서지도 않았다. 그게 게시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변화의 시기는 게시판의 오픈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 회사 기강이 해이해진 원인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이유다.
젊은 직원들의 변화에 기죽을 만큼 내 회사 생활은 허술하지 않다. 뒤숭숭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사리분별 못하고 예의마저 잃는 그들을 좀 더 강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마저 들었다.
*
“아니, 최 과장이 꼰대라는 건 아닌데...”
차장은 이 문장을 말 끝에 붙이며 내가 바로 성토 대상의 전형이라는 걸 확인 사살했다.
방어기제가 작동한 나는 “요즘 친구들이 회사생활을 전혀 모른다.”며 남은 식사 시간동안 침 튀기며 열을 냈고 차장은 맞장구를 쳐주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차장은 “그래도 지금의 태도로 일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부대찌개가 밑바닥을 보일 때쯤에는 결국,
“너 고과도 계속 하위 평가만 받고 있잖냐. 요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데. 니가 밑에 애들한테 하는 거 보면서 팀장이 손뼉 치고 있을 거 같냐? 팀원들 불만 생기고 게시판에 한마디라도 올라오면, 암만 익명이라도 그게 결국 팀장한테 칼 꽂는 건데. 요즘 사원, 대리 놈들 겁 없어. 팀장이랑 면담할 때 물불 안 가리고 너 얘기하고 있을 걸?
아니 아니, 열 내지 말고 들어봐. 나는 당연히 최 과장이 일 잘하는 거 알지.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냐? 너네 동기들 진작에 차장 달고 빠른 놈들은 부장 발탁 준비하고 있어. 스무스하게 가자, 스무스하게. 적당히 젊은 친구들 공감하는 척이라도 하자는 거야.”
아픈 구석까지 사정없이 맞고 나니 점심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 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뒤쪽에 앉아있는 대리 둘을 따로 불러서 평소처럼 면박이나 주려다 참았다.
내가 입사했던 때만 해도 얼토당토않은 상급자의 개인적인 지시까지 군말없이 따랐었다. 그게 바로 ‛일 잘하는 직장인’의 올바른 태도다. 그때에 비하면 오히려 나 정도는 이성적인 상급자 아닌가. 개인적인 지시는 하지 않을 뿐더러, 회식 때도 나보다 어린 팀원들에게 부어라 마셔라 하지도 않는다. 회사에서 성장하기 위해 도움 될법한 조언만을 사려 깊게 해주곤 하는, 그런 합리적인 선배가 나란 말이다.
속으로 불을 뿜어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저분해진 기분을 억누르며 익명게시판을 정독해보기로 했다. 어떤 얘기들이 있나 읽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 우리 부서장은 자기가 뭘 시키는지도 모름.
석기시대 프로그램들 얘기만 주구장창. 삿대질은 습관.
- 회식이나 없었으면 좋겠네. 밥은 집에가서 알아서 드시지.
혼자 그냥 야근할테니 늬들끼리 회식 다녀왔으면 좋겠다.
- 프로그래밍으로 난리치는 부서는 그래도 행복한 줄 알자.
우리는 윗분들께서 코딩은 하나도 모른다. 출퇴근시간으로 매일 두어 시간씩 난리침.
어지럽다.
대졸자들이 못 들어와서 안달인 제법 큰 IT 회사. 채용 때마다 5:1을 훌쩍 넘는 경쟁률이 보도되는 기업. 내 앞뒤 양옆으로 서울 상위권 대학을 나온 똑똑한 녀석들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그런 녀석들이 고작 이 정도 시답잖은 이야기를 숨어서 징징거리는 수준이라니.
애사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시대가 변했다치더라도, 이건 성인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이런 글을 써 놓는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 자신의 열정을 쏟으려고나 할까.
수많은 비슷한 글들이 화면을 따라 쭉쭉 지나갔다. 차장과의 대화 이후여서 그런지 더욱 감정을 이입해서 읽게 됐다.
회사는 망가져 가고 있다.
적어도 내가 신입사원 때는 회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나 말고도 다들 그랬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그저 회사를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만 다니고 있다. 내가 몇 명 호되게 혼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 그런 문화가 이미 팽배해 있다.
며칠 동안 꾸준히 익명게시판을 읽었다. 하루하루 젊은 직원들에 대한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면서 업무 의욕이 급격히 떨어졌다. 주변의 어린 팀원들이 거머리 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조직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월급과 복지만 빼먹고 사는 그런 벌레들. 벌레들도 한두 마리여야 잡을 마음이 생긴다. 꾸준한 게시판 정독을 통해서 벌레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지금, 전에 없었던 회사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혼자 열심히 일해서 뭐 하나. 될 대로 되라고 하자. 어차피 회사가 내 것도 아닌 걸. 내 나름대로 이 세태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자체 파업.
침묵을 지키며 자리에서 노닥거리기로 굳건하게 마음먹었다. 익명게시판이 생기고 세 달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익명게시판(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