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의 단편집
창문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거미. 거미줄 한 가닥만을 생명줄처럼 잡고 있는 거미.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넓고 편안한 주거지이자 생계의 터전이었을 거미줄이 단번에 찢어졌다. 아침 댓바람부터 집과 일터를 잃은 거미는 좌우로 대롱대롱 한 가닥 줄에 목숨을 맡긴 채 혼란스러워 한다.
손을 뻗어 거미를 받쳤다. 여덟 개의 다리가 어딘가에 닿자 빠르게 움직인다. 생존본능.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 집을 지을 수 있는 어딘가로 움직여서 다시 터전을 만들어야만 한다.
거미를 보내주려다가 황급히 손을 뻗어 빈 상자로 거미를 넣었다. 손톱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거미는 잠시 멈췄다가 자신의 몸이 들어찬 공간이 어느 정도의 크기와 깊이인지를 가늠해 보려는지, 이리저리 움직인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의 원서를 주문했던 택배 상자는 책들의 두께만큼 꽤 깊은 편이다. 책상을 두리번 거리다가 테이프를 찾았다. 거미가 보일만큼 틈을 주고 상자의 뚜껑을 붙였다.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게 놔두면 아내가 휴지로 뭉개어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릴 것이다. 혹은 무거운 가구들의 틈 사이로 제 집을 만들러 찾아 떠나다 한번에 들이닥친 이사 인부들의 발에 밟혀 삶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던 곳보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우선은 이렇게 있는 게 안전하다. 밖에 나가다 안전한 곳이 보이면 풀어주리라. 최상위 포식자가 창문 한 번 열었다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은 생명체에게, 이 정도의 안전은 보장해 주어야 최소한의 도리일 테다.
방에서 나와 기지개를 켰다. 거실에는 박스들이 널브러져 있고, 10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가 절반정도 찬 상태로 놓여 있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틈틈히 이삿짐을 싸고 있다. 아마 아침에도 눈에 들어온 잡동사니를 쓰레기 봉투로 얼마만큼 채워넣은 후 급하게 출근했을 것이다.
그래도 식탁은 깨끗했다. 아내는 식탁의 가장 깨끗한 위치에 빵과 과일을 식탁보로 덮어두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연구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밤을 보낸 탓인지 뜨끈한 국과 밥이 먹고 싶었다. 가스레인지 위는 깨끗이 닦여 있었고, 밥솥에는 밥이 조금 있긴 했지만 막상 주걱을 꺼내려니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과 밥을 먹겠다는 생각은 마음 한 구석으로 빠르게 밀어넣었다. 대신 기계에 캡슐을 넣어 커피를 내렸다.
천천히 커피향과 빵의 맛을 음미하며 정돈되지 않은 집을 감상하듯 둘러본다. 나는 이 집이 좋았다. 한 개의 방과 한 개의 거실, 그리고 반 개로 쳐도 될 만한 방이 하나 있는 집이다. 이 반 개짜리 방이 내 방이다. 창고나 펜트리 공간 크기의 방에 딱 들어갈만한 책상과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는 책꽂이를 두었다. 항상 무언가 연구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기꺼이 창고 공간을 서재로 꾸몄다. 작은 환기창만 있는 이 공간에서 많은 것들을 했다.
고개를 빼쭉 내밀어 침실을 봤다. 침실에서 자지 않은지 꽤 오래됐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서재(그러니까 창고)에서의 내 연구는 항상 아주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다. 새벽 두 세시쯤은 이미 아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시간이다. 신혼 초창기에 나는 몇번이나 바스락거리며 침대 이불 속으로 몸을 넣다가 아내를 깨웠다. 아내는 화나 짜증을 내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행동에 누군가가 영향을 받는 게 싫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주로 서재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다. 서재방은 작았기 때문에 바닥에 눕기 위해선 의자를 완전히 벽에 붙인 후, 발을 책상 아래로 넣어야 반듯이 누울 수 있었다. 그래도 아내를 깨우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쬐끄만한 화장대의 화장품들도 모두 어딘가 상자로 들어간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썼을 기본적인 몇 개의 화장품들만 화장대에 남아있다.
아내 회사의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저리로 얻은 전세집. 나는 이 집이 전세라는 것과 시세보다 낮은 이자를 갚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아내는 종종 거실의 소파에서 나를 옆에 앉힌 후 이 집에 들어가고 있는 비용과 재무적인 구조를 설명해주었다. 나는 이 구체적인 설명들을 항상 대충 들었다. 아내는
“여보, 지난 번에도 알려줬잖아. 좀 잘 들어놓고 기억해야지.”
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잘 알잖아. 나는 당신만 믿어.”
라고 내 신뢰를 보여줘 왔다.
이사 얘기를 할 때도 그랬다. 아내는 가정에 중요한 논의거리가 있으면 나를 소파로 불러 옆에 앉혔다. 중요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아내가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을 보고는 감정을 넣어두었다.
“왜?”
“우리 이사가야 해.”
“왜?”
나는 아내에게 “왜?”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아내는 현명하고 합리적이며 빠르다. 아내의 결정은 대부분 옳다. 내가 아내에게 굴복하며 살아가는 여타 유부남들과 같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 나는 무려 개인 방이(창고를 개조한 것이긴 하지만) 있는 남자다. 매주 두 번씩 재활용품을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가는 남자들과는 결 자체가 다르다.(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결혼 후 분리수거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아내에게 “왜?”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이사는 좀 달랐다. 말했듯 나는 이 집이 좋았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요즘 전세 시세가 많이 올랐다고 얘기했었지? 그래서 지난 2년차 전세계약 끝날 때도 자칫하면 고생할 뻔했잖아. 기억나?”
그래도 나는 무심한 남편이고 싶진 않다. 머리 속을 굴려 아내가 했던 말들 중 작은 파편이라도 찾아내려 노력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떠오른 답을 했다.
“오 퍼센트인가, 그런거 얘기했던 그때 말하는 건가?”
“맞아. 안 잊어버렸네. 법이 생겨서 다행히 한 번 연장은 했잖아.”
“응. 기억하지, 그럼. 근데 그러면 아직 1년은 더 넘게 남은거 아니야?”
“응. 그런데 전세시세가 너무 올라서 집주인이 다른 세입자를 들일 껀가봐.”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 계약이 무슨 소용이야?”
아내는 ‘법은 그렇지만 집주인이 자기가 들어와서 살겠다고 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거나 ‘게다가 이 집이 매매 매물로도 올라와 있다’는 이야기를 쭈욱 늘어놨다. 나는 이런 경제나 금융 이야기는 잼병이기 때문에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 부분부터는 다시 한 귀로 흘렸다. 내 머리속은 다시 서재방에서 하던 연구를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본질만 알면 된다. 어쨌든 아내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나는 따르면 된다. “왜?”라고 물어본 것은 어떤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거나 반대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니까.
빵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마무리한 후 서재로 돌아왔다. 테이프로 위를 붙여 놓은 택배 상자안을 보니 거미가 얌전히 상자 안을 돌아다니는 중이다. 답답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지금 나가기엔 귀찮다. 게다가 하던 연구를 마저 끝내야 하지 않나. 오늘은 오랜만에 오후의 일정이 있기 때문에 오전 중에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나는 개지 않은 이불 속으로 몸을 넣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 속을 굴리며 연구를 시작했다.
('거미의 집(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