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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Oct 22. 2024

거미의 집(4)

루카의 단편집

('거미의 집(3)'에서 이어짐)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내가 돌아왔다. 귀가한 아내는 분주하다. 아내는 항상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한다. 가스레인지에 무언가를 올린 후 이사짐을 마저 정리하고 있다. 

 “여보, 이 방도 짐 싸야 할 거 같은데.”

 “알았어.”

 “알았다고만 하지 말고 바로바로 정리해야해. 바로 이번주가 이사인데 이 방만 깨끗하잖아.”

 “응.”

 새로 이사갈 집에 방이 몇 개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아내가 휴대폰으로 찍어온 사진을 보여준 듯 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못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싶진 않았다. 

 “근데 이사갈 집 안가봐도 괜찮아?”

 아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번에 안가봐도 된다며.” 

 그랬었나. 또 나는 뭔가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걸어갈 거리니까 저녁 먹고 같이 가보자. 지금 비어있어서 갈 수 있을거야.”

 “알았어.”

 아내는 방의 짐들 중 주의를 요하는 물건은 따로 잘 챙겨 놓으라고 했다. 이 방의 모든 책들이 귀하다고 답했지만, 아내는 ‘단가가 높은 물건’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준 채 부엌으로 돌아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방을 스윽 둘러봤다. 좁지만 깨끗하다. 아내는 집에 쓰레기가 남아있는 걸 두고보지 못한다. 그때그때 재활용품부터 일반쓰레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린다. 이 책들을 어떻게 포장해야 하나. 


 책들은 분류가 확실하다. 아내가 이 방에 해 줄 수 있는 건, 방을 마련해주고 쓰레기를 치워주는 것까지지만 책들을 분류대로 정리하는 건 내 몫이다. 아니, 몫이 아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철학서적들부터 문학, 과학 등이 손이 잘 닿는 곳에 세부 분야별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꽂혀 있어야 한다. 거의 없는 자기계발서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꽂혀있다. 이 방에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다. 이 깨끗하고 오차없는 분류가, 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책상은 비좁지만 노트북 하나와 책 몇권이 올라올 정도는 충분하다. 오른쪽 구석에는 펜 꽂이에 만년필 한 자루와 시계가 거치대에 놓여 있다. 결혼하면서 아내가 사준 것들이다. 사실 아내는 고가의 시계를 사주려 했다. 나는 시계의 단가를 낮추고 그 차액만큼의 만년필을 사주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아마 잉크는 말라 있겠지. 별로 쓰지 않는다. 나에게 꽤 비싼 만년필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시계도 별로 차 본적이 없다. 오토매틱이라서 시간이 멈춰있다. 마찬가지로 시계가 있다는게 중요한 것. 방을 감상하고 있자니 방을 넘어 아내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노끈 줄까? 아니면 상자를 줄까?”

 “노끈!”

 상자에서는 이사 중에 책들이 흐트러지며 서로를 상하게 할 수 있다. 노끈으로 묶으면 넘어질 수는 있어도 서로를 해치진 않는다. 노끈 뭉치가 또르르 굴러왔다. 그리고 다시 거실 쪽에서는 거침없이 무언가를 버리는 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짐 다 싸겠어?”

 아내가 고무장갑을 낀 채로 방에 들어온 건 저녁 아홉시 무렵이다. 책꽂이의 절반도 노끈으로 묶지 못했다. 

 “어려우면 이삿짐에 책들도 다 맡기고.”

 나는 펄쩍 뛰었다. 인부들이 마구잡이로 상자에 집어넣을게 뻔한데. 아내가 옆에 앉아 빠르게 책들을 내리고 노끈으로 묶으려 했다. 나는 아내를 말렸다. 

 “여보, 이게 분류가 다 있는거라서, 책 묶는 건 내가 해야 해.”

 아내는 짜증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상자를 가져와서 다른 잡동사니들을 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물건들을 손대는 것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내는 나지막히 말했다.

 “당장 이번 주가 이산데 빨리 정리 안할거면 사람들에게 다 정리하라고 하는 수 밖에 없어. 아저씨들이 마구잡이로 상자에 정리하는 것보다는 내가 이런 정리라도 하는게 빠를거야.”

 아내는 나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독립적인 공간과 생활을 존중해 준다. 그것이 아주 이상적인 모양은 아니더라도, -가령 이 방이 명사의 거대한 서재처럼 웅장하진 않은 것처럼-현실적인 선 안에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선택지를 준다. 이삿짐 정리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상적으로는 네가 차근차근 깨끗이 정리하는걸 좋아할 거라는걸 안다. 그러나 시간은 없다. 내일 이사짐 센터 직원들의 손을 타게 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이 곁가지 정리들부터 빨리빨리 해결해 버리는 게 나을 것이냐, 두 가지 현실적인 선택지를 준다. 선택지를 준 것 같지만 이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지다. 

 라는 생각을 풍부하게 하고 있을 때, 아내는 이미 빠르게 책상 위와 책상 아래의 쓰레기, 잡동사니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전쟁터의 베테랑이 전장을 누비듯 아내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이따가 이사갈 집도 가보겠다며. 지금 가도 늦은 시간이야. 나가는 김에 분리수거도 한번 싹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전장의 베테랑이 돌격할 때 병졸이 할 수 있는 일은 잘 따라가거나 잘 따라가는 척 뿐이다.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노끈을 묶었다.


('거미의 집(5)'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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