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글의 기억

by 서인석

글은 공정해서 매력적이다.

한글을 기준으로 하나의 문자 안에 두 개, 세 개, 혹은 네 개의 모음과 자음이 만나야만 한다. 그것은 공정의 시작이며 글의 규칙이다. 이것부터 쌓아야만 단어가, 문장이, 문단이, 챕터가, 한 권이, 시리즈가 나온다.

손으로 직접 쓰거나 타이핑으로 화면에 글자를 만들거나. 어떤 행위를 해야만 한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우리는 절대 글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일 뿐이다.

생각이 아무리 재밌어도 이 공정함의 틀 안에, 잘 읽힐만한 형태의 자음과 모음, 단어, 문장, 문단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어떤 이야기도 될 수 없다. 레고 조각이 방바닥에 굴러다니면 그저 부비트랩일 뿐인 것처럼.


무형의 생각을 유형의 무엇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그 완성의 즐거움에 취해, 계속 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아니다. 누군가 읽어줄 때 즐겁고 힘이 난다. 생각 속에서 충분히 재미있었던 그 무형의 무언가를, 확고한 틀이 갖춰진 글로도 잘 만들어냈다는 뿌듯함이 자리 잡는다.


그렇게 나는, 몇 년째, 매년, 어딘가에라도 내가 완성한 글들을 제출한다. 그리고 몇 년째, 매년, 어떤 수상 소식은 없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몇 가지 존재한다.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실.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와 글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나에게는 재능조차 없다는 사실.


수상자들 목록을 보고 있으면 동경과 좌절이 함께 스쳐간다. 언제부턴가 문학 수상자들은 나보다 어린 사람들로 1년씩, 1년씩 더 어려지고 있다.

그래, 그동안은 적어도 '젊은'이라는 타이틀조차 붙일 수 있었고 그것은 '서툰' 글의 핑계라도 될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젠 그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글쓰기로 칭찬받았던 기억은 1년, 1년씩 멀어지고, 나는 여전히 뭔가 쓰고 있지만.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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