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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24. 2020

덩케르크(2017)

영화리뷰

<전쟁은 전쟁영웅에게조차 비극이다>


◇ 영화에서는 필연적으로 미화되어왔던 전쟁

 '전쟁영화'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큰 스케일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폭격들과 아비규환의 그 자체인 장면들. 거기에 덧붙여지는 영웅적 먼치킨 주인공과 그를 돕는 주, 조연들. 마지막으로 전쟁의 잔인함과 여기에 대비되는 주인공의 인류애적 모습이 펼쳐지며 영화가 끝나는 모습. 이는 전쟁영화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할리우드'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사상까지 개입한다. 잠재적으로 숨어있는 '미국적 가치'와 '미국 패권의 정의'는 관객들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관객들의 가슴에 스며들게 된다.
 한국의 전쟁영화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 많은 영화 레퍼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한국은 한국전쟁이라는 소재로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만큼 미국이든 한국이든 전쟁이 준 인상과 상처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크고 강렬하다. 한국의 경우는 좀 더 신파가 많이 묻어난다는 작은 차이가 있을 뿐.
 그런데 이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같은 전쟁영화이지만 전혀 다르다. 


◇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먼치킨인 주인공이 등장해서 어떤 총알도 맞지 않고 동료를 구하며 작전을 성공하고, 승리의 함성을 내질러야 할 할리우드 전쟁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누가 주인공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쉽지 않다.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고, 한편으로는 모두가 주인공이기도 하다. 누구도 영웅적 면모를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영웅같다.
 게다가 전쟁영화의 특성상 당연히 등장해야 할 '악'은 아예 얼굴조차 한번도 보여지지 않는다. '나쁜 놈'이 등장해야 '착한 놈'이 착해 보이고 옳아보이며, 권선징악이라는 식상하지만 깔끔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낼 수 있을텐데, '적'에 해당하는 독일군은 아예 제대로 얼굴도 비추질 않는다. 그저 폭격만 등장할 뿐.
 놀란 감독의 의도였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가 '적과 싸우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살아남는' 인간영화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동안의 전쟁영화나 히어로물에서 주인공을 통해 느껴지는 정의감과 선이 이긴다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분명 관객인 우리와는 괴리된 모습의 주인공이지만 그 멋스러움에 감탄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그저 우리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역시 저 영웅은 멋있어!, 옳아!"가 아니라, "저렇겠지.."라는 극 사실주의적인 모습. 관객인 우리의 모습은 때론 비참하고 조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작고 당연한 모습인데도 꽤 멋져보일 때도 있는 것처럼.
 어선으로 구조에 나선 나이 많은 선장, "That's enough."이라며 보급품을 건내는 노인, 해변에 남은 대령까지. 아주 약하지만, 그 어떤 강한 모습보다 현실적이고 영웅스러운 모습이다. 모두가 주인공이다.

◇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젊은이들이 총알받이가 되는가?"

 도슨은 '어른들'의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 자책하며 어선의 줄을 풀고 망망대해로 떠난다.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수 많은 어선들이 덩케르크 해안으로 다가오는 장면은 비록 전쟁을 일으킨 자들과 동일인이 아님에도,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안고 그 책임을 응당하게 지려는 사람들, 우리식 표현으로 '민초'들이 한둘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눈물날 법한 장면.
 늘 나라가 힘들고, 국민이 힘든 순간에 먼저 움직인 것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IMF에 금을 내놓는 사람들은 꼭 부자들은 아니었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은 젊고 어린 학생들이었고,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이들도 젊은이들이었다. 이것이 단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세상과 시대가 어둡고 이기적이지만, 그래서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그들의 이익을 취하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자각하고, 시대의 책임에 대해 당당하게 어께 위에 올리려는 '옳은' 어른들도 분명히 존재함을,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어른들보다 훨씬 많음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자 했다.

◇ "신경쓰지 말게, 우리 모두는 아니깐."
 "공군은 뭘 했냐"고 비아냥 거리는 다른 병과 군인들의 시선에 대해 "신경쓰지 말게, 우리 모두는 아니깐."이라는 시크한 말.
 단일된 개별의 전투는 전쟁의 큰 관점에서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수십만 수백만이 싸우는 전쟁터에서 한명의 싸움은 티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 단일의 전투들이 모여서 전쟁이 된다. 그 단일의 전투들을 위해 사지로 나가고 목숨의 향방이 갈린다. '책임지는 어른'의 표본인 도슨은 이것을 아는 것이다. 그 또한 전쟁으로 잃은 것이 있는 어른이기에, 더 절절히 알고 있는 것이다.



◇ '피터'와 '떨고있는 병사' 그리고 '조지' 
 아버지 도슨과 구조에 따라간 피터, 그들이 구조한 '떨고 있는 병사', 그리고 전쟁에서 뭔가 도움이 되고자,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고자 했던 '조지'. 

 전쟁에서 죽는 것은 군인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꼭 총알을 맞고 포를 맞아야 죽는 것도 아니다. 공군으로서 편대 공격에 참여했지만 피습으로 추락하고 구조된 '떨고 있는 병사'는 공포로 인한 증세가 극심하다. 도슨과 피터, 그리고 조지는 그를 구조한다. 

 그런데 이 극단적인 공포증으로 인해 병사는 조지를 다치게 한다. 과연 '구해준 자를 다치게 한' 공군 병사를 무작정 비난할 수 있을까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무 자르듯 나눌 수 있을까?
 영화 '캡틴아메리카 : 시빌워'에서 '블랙팬서'는 복수심에 '윈터솔져'를 지구 끝까지 쫓아간다. 그러나 블랙팬서가 내린 결론은 그의 아버지도 피해자이지만 윈터솔져 또한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시빌워 편에서 그 어떤 히어로들보다도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덩케르크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군 병사 또한 전쟁의 피해자고, 조지는 전쟁의 피해자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에 따른 피해자가 됐다. 도슨의 표정은 그래서 누군가를 탓하는 표정이 아니다. 그저 조지를 잃게 되는 낙심만을 담고 있다.
 피터는 어리다. 그래서 피터는 조지를 다치게 한 공군 병사가 원망스럽다. 안절부절하며 '친구가 괜찮냐'는 질문을 하는 공군 병사의 걱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괜찮지 않다"고 대답한다. 소리를 지르지도, 화내지도 않는 대답이지만, 그 어떤 화보다도 강하고 격하게 공군 병사를 질책하고 원망하는 목소리.
 그런데 피터 또한 결국엔 도슨처럼 알게 된다. 이 공군 병사도 피해자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친구를 잃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을 지니고 있지만, 긴박하고 급한 상황들 속에서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삭히지도 못하는 중에 다시 상태를 묻는 공군병사에게
'괜찮다'라고 대답하는 그 모습은 오히려 '안 괜찮다'는 대답보다 더 안타깝고 슬퍼보인다. 그럼에도 피터는 '괜찮다'는 대답을 통해 공군 병사를 이해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 더 조심하세요."라는 대사도 우리를 울컥하게 한다. 기억하자.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모든 강제적으로 참여된 이들까지 피해자로 만든다.

◇ "그거면 충분해."
 돌아오는 기차에서 구조된 병사들은 걱정이다. '살았다'는 안심 뒤에 따라오는 이 걱정에는 '정치성'이 담겨 있다. 그들의 모습은 흔한 전쟁영화에 나오는 먼치킨 히어로급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패잔병'이다. '우리가 초라하냐'는 대사에도 담겨있다. 왜 이들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들은 원해서 고립된 것도, 원해서 전쟁에 참여한 것도 아닌데, 이젠 그저 구조되었다는 이유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패잔병'은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노인에게 "그저 살아왔을 뿐이에요!"라고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그 무거운 마음을 차마 속으로 껴안을 수 없어서,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다 잊은 상태의 그저 '군인'으로서의 질문. 대충대충 앞도 보지 않고 물자만 나눠주는데 바쁜 그 노인의 대답.
 "That's enough"
 그렇구나.. '군인'은 '인간'이다. 나라와 정치를 떠나서 죽어가는 이들이 살아왔다는 것, 사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놀란이 말하고 싶은 주제들 중 가장 중요한 하나.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시절, 늘 바쁜 훈련 일정에 치이다가도 훈련이 끝나고 돌아오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소대원들에게 늘 감사했었다. 이 친구들이 안 다치고 주둔지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사실 고맙고 다행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훈련이 이럴진데 전쟁은 오죽할까.
 모두가 잊어가던 인간성에 대해 짧고 굵은 대사로 다시 깨닫게 해준다.



◇ 음악

 영화감독은 놀란이지만, 한스 짐머 음악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도 아니다. 놀란 감독이 엄청난 용을 그렸다면, 그 용 그림의 마무리는 화룡점정으로 짐머 감독이 해낸다. 인셉션이 그랬고, 인터스텔라가 그랬다. 두 감독의 콜라보는 늘 흥행여부를 넘어서서 '어마어마한' 수준의 작품을 만든다. '영화'를 넘어선 '작품'.

 관객들은 모두 -특히- 공군의 장면에서 숨까지 멈추는 긴장감을 느낄 것이다. 음악이 이 긴장감을 엄청나게 고조시킨다. 인터스텔라의 도킹 장면같은 긴장감이다.
 짐머 음악감독의 음악 배치는 마치 줄타기의 장인이 엄청난 높이로 공중에 뛰어올랐다가 다시 훅-하고 내려와서 잔잔하게 잰걸음을 걷는 모습을 반복하는 것 마냥 '밀당'이 뛰어나다. 글로 음악을 설명하기 어렵다는게 통탄스러울 따름.


◇ 그래서 전쟁은
..
 전쟁을 소재로 평범한 스토리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어렵다. 흥행이나 공감이 목적인 영화들은 더더욱 그렇다.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는 다큐는 많아도,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전쟁영화가 없는 이유.
 그런데 덩케르크는 평범하고 극 사실적인 소재와 진행으로 '다큐'가 아닌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영웅도 등장하지 않고, 누가 주인공인지도 불분명하지만 그 어떤 영웅들보다도 강렬하고, 그 어떤 주인공들보다도 이 세계의 주인공 같은 모습을 그려내며 놀란의 세상을 보고 그려내는 철학과 시선을 극적으로 끌어낸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신문 기사와 처칠의 이야기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매듭짓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환경 때문에 매몰되었던 인류애를 침착하게 매듭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슬며시 관객들에게 넘기기도 한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대령의 모습은 많은 전쟁영화에서 '장교'라는 직책이 비겁하고 유약하게 그려지는데 반해, 어선들을 가지고 덩케르크로 온 '어른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서 뭉클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들 중에도 책임있는 모습의 어른들이 있다는 상징이다.
 전쟁에 대해 잔상이 많이 남겨져 있는 미국만큼이나 한국이 전쟁에 대해 갖고 있는 아픔은 크다. '승리'가 아닌 '전쟁' 자체에 대해 여러 시각과 생각을 던져주면서도 재미와 소름을 함께 전해주는 덩케르크의 감상을, 도슨 할아버지의 대사를 다시 한번 적으며 마친다.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왜 젊은이들만 총알받이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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