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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24. 2020

인턴(2015)

영화리뷰

<잔잔함 속에 깨닫는, 잊고 살았던 중요한 것들에 대해>


◇ 리뷰 전 잠깐, [영화]가 갖는 고유의 특징에 대해

 영화는 여러 문화생활 중 가장 소비자의 감정을 극에서 극으로 매만져야 하는 매체다. 영화만 다른 문화생활들에 비해 뛰어나거나 우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갖는 고유의 속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짧게는 십 수 편, 길게는 수 백 편이 이어진다. 드라마의 작가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천천히 긴 흐름으로 보여줄 수 있다. 책은 한 권을 소비하기 위해 때론 드라마보다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아니, 애당초 책은 독자에게 소비의 시간을 전적으로 일임한다. 하지만 영화는? 두세시간 안에 기승전결을 모두 털어내야 완벽한 이야기 진행이 마무리된다.

 그래서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의 내용이 극과 극을 달린다. 달려야만 한다.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들은 영화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짧은 시간에도 절정으로 치달아가는 흐름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불만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드라마와 달리 우주에서 싸우기도 하고, 온갖 선혈이 낭자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결말이 지어진다.


◇ 영화에서 '잔잔함'이 갖는 난제

 잔잔한 영화는 그래서 성공하기 힘들다.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등관계를 짧은 시간안에 최대한 고조시키고, 이를 최대한 시원하게 풀어내는데 잔잔한 소재는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잔잔한 영화는 종종 나오고, 또 성공한다. 피로감 때문일까.

 인턴은 이런 잔잔한 부류에 속하는 영화다. 만약 영화의 흐름이 젊은 여성 인턴인 앤 해서웨이가 수 많은 역경을 딛고 CEO에 이르는 스토리였다면 그야말로 '영화스러운' 영화였을지 모르지만, 영화가 끝날때가 되도 CEO 줄스는 여전히 CEO고, 인턴 벤은 여전히 인턴이다. 

 그러면 이 영화의 재미는 뭘까. 단순히 CEO의 나이와 인턴의 나이가 바뀌었다는 점? 음, 매우 흥미로운 요소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여기에 바로 '잔잔함'을 해답으로 제시하고 싶다. 주연인 줄스와 벤은 말했듯 끝날때까지 CEO고 인턴이다. 어떤 외적인 변화를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변했다. 아주 잔잔하게. 줄스는 여전히 CEO로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올렸지만, 영화가 시작할 때의 줄스와 끝날 때의 줄스는 결여되었던 '무언가'가 채워진 느낌이다. 그게 뭔지 알 수 없다. 잔잔하기 때문이다.



◇ 벤, 어떤 젊은 남자 주인공보다 멋스러운 할아버지

 영화를 보는 내내 인턴이자 노인인 벤이 참 멋진 남자고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영화를 본지 수 년이 흘렀지만,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앞사람과 가볍게 인사하는 부분]은 요즘 래퍼들이 보여주는 명품 액세서리로 무장한 멋보다도 수 천 배는 더 멋스럽다. 또한 [빌려주기 위해 갖고 있는 손수건]은 요즘 래퍼들의 손목에 기본 사양처럼 둘러진 롤렉스보다 훨씬 빛이나 보인다.

 영화는 마치 일방적으로 연륜이 모자란 줄스가 연륜있는 벤에게 무언가를 배워가는 형태의 묘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벤은 물론 영화의 시작부터 나이만 많이 들었을 뿐, 열린 사고를 가진 젊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젊음은 '인턴'이라는 옷을 입으면서 더 형체화되고 단단해진다. 벤과 친하게 지내려는 젊은 동료들이 그 모습을 더 가시화해서 보여준다. 그들은 결국 '줄스 엄마 집 털이'라는 특수 작전까지 함께 수행하게 된다.


◇ 줄스, 그녀에게 사실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줄스는 외적으로 모자랄 것이 없고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 나이에 누구도 이루지 못할 높은 성을 쌓았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놓쳤던 것들이 있었다.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전문 경영인 채용' 문제는 줄스와 남편이 확신할 순 없지만 뭔가 그 사이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기에 대안으로 제시한 답이기도 하다. 재밌게도 우리는 영화에서 줄스가 채용하고자 하는, 혹은 채용 직전까지 간 '전문 경영인 후보'의 얼굴을 단 한번도 볼 수가 없다. 

 대신 영화는 가장 마지막에 벤의 체조 장면을 보여준다. 줄스는 벤에게 채용의 결과에 대해 '마치 상을 받은 아이가 아빠한테 자랑하러 달려가듯' 빨리 알려주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벤은 또래의 사람들과 탁 트인 잔디에서 체조를 하고 있고, 매우 편한 표정이다. 벤의 제지에 조용히 벤 옆자리로 자리한 줄스는 어설프게 자세를 따라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만 벤은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한다.

 줄스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전문 경영인 채용]과 [체조]의 대비로 명확해진다. 줄스와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 경영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넓은 잔디밭, 일 얘기 안하고 스트레칭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화는 이를 아주 잔잔하지만 강한 울림과 함께 보여준다.


◇ 나이라는 깊이를 채워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나는 아직 많이 어린 사람이지만 때때로 '멋있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멋있게 늙는다'는 것은 재력이 기준일 수도 있고, 여행을 많이 다닌다거나 널찍한 집에서 안락하게 산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은 적어도 내면의 답을 제시하는 사나이다. 생각이 젊은데 쌓아온 연륜은 깊이있다면, 그것은 어떤 멋보다 강력한 지혜의 늪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아마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그 멋에 흠뻑 빠져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최근 이 영화가 케이블에서 방영되어 아내와 다시 봤다. 처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는 잔잔한 울림을 준다는 기억 정도로 남겼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참 별거 없이 멋진 영화다. 나는 어쩌면 이 영화를 잊고 살았던 4~5년의 시간동안 무언가를 잊고 지냈던 것은 아닐까. 줄스가 추구하는 외적인 성과들에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벤이 가진 깊음의 중요성을 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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