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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25. 2020

서울특별시 송파구

장소프로젝트

 울산 출신이고, 또 출신인 도시에 대해 강렬한 애정과 그리움을 간직한 나에게 '서울'은 마냥 동경의 대상은 아니다. 이전 책, '명함을 정리하며'에서도 서울의 차가움에 대해 여러 글들로 표현한 바 있다. 주소를 서울로 둔지 어느덧 일곱해를 넘기고 있는데, 더 짧게 지냈던 도시들에 비해 여전히 정을 붙이기 쉽지 않다. 서울은 마치 단단한 벽들로 둘러싸인 성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서울은 밥벌이를 위해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현 직장은 나에게 애정의 공간이고 자부심의 한 꼭지를 담당한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 직장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상당하다. 그런데 그 직장생활을 위해 머물러야 하는 곳, 그 직장이 위치한 곳인 이 도시에는 도무지 정감이 늘지 않는다. 


 전역 후, 송파구로 터전을 잡은 이유는 본사 위치 때문이었다. 잠실 한복판에 위치한 회사와 접근성이 좋은 곳을 어떻게든 구해야 했다. 잠실 아주 근방으로 집을 구할 수 없어서 한 두 정거장 정도의 빌라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송파구와의 삶이 시작됐다.

 홍천에서처럼 하루 십 수 킬로미터씩을 걷던 하루하루를 유지하고 싶었다. 입사 후 군 복무때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아져서 맘먹고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한게 몇 번이나 된다. 

 안타깝게도 송파구에서는 홍천에서만큼 도무지 걸을 수 없었다. 나는 홍천에서 암전과도 가까운 시골길들을 탐험처럼 지도를 뒤져가며 걸었고, 거기서 뜬금없는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송파구는 몇시가 되어도 불을 끌 줄 몰랐다. 어디로 가도 길이 뚫려 있었고, 어디로 가도 사람과 차로 넘실됐다. 홍천에서 갓 넘어온 나에게 송파구는 백야현상이 일어나는 듯 보였다.


 2013년 3~4월 무렵은 아직 군 복무를 하던 시기였다. 2주짜리 사격훈련이 있는 기간에 한 회사의 적성검사를 보러 서울을 가야 했다. 당시까지 나에게 서울은 한없이 먼 곳이었다. 물론 학교 캠퍼스가 있던 동작구의 극히 일부 위치만은 예외였지만. 시험장을 찾아보니 '일신여상'이라는 장소였다. 아침 일찍 입실해야 했기에 부대의 허가를 받고 그 전날 시험장 근처를 찾아갔다. 

 동서울터미널에 내린 후 일신여상이라는 장소를 찾은 시간은 매우 늦은 때였다. 대충 시험장 위치를 알았으니 잘 곳을 구해야 했다. 구글지도에서 한 찜질방이 나왔다.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 있는 장소였다. 아마도 상가 내에 위치했던 모양이다. 지도만 보고 쭉 따라오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양 옆을 둘러봤다. 모든 단지의 불이 한군데도 켜져 있지 않았다. 상가 건물은 폐쇄된 것처럼 나무 판떼기로 막혀있었다. 

 후에 알았지만 재개발 중인 단지였다. 구글 지도에는 아직 반영되기 전이었던 모양이다. 이 곳은 나중에 '헬리오시티'라는 이름으로 약 6년 후 입주를 시작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그런 걸 전혀 알았을 턱이 없다.

 폐허처럼 구겨진 자재들을 뛰어넘고 어둠을 지나 한 큰 공원을 가로질렀다. 이 곳도 나중에 알게 되지만 '백제고분공원'이었다. 여기를 지나자 꽤 밝아졌고, 큰 높이의 건물에 찜질방이 보였다. 늦고 피곤한 잠을 청했다. 

 눈을 떴을 때, 이상한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시간이 늦은 것이다. 물론 입실 시간까지 늦을 것 같진 않았지만, 생각했던 스케줄은 완전히 깨졌다. 나는 시험장 입실 한시간 전쯤에 도착해서 커피 한 잔과 아침을 먹고, 서울 사람인 것처럼 여유롭게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허둥지둥 찜복을 벗고 황급히 목욕을 마친 후 짐을 챙겨 시험장에 뛰어 도착하니 시간이 맞았다. 나는 뛰면서 주머니의 이어폰을 찾았는데 없었다. 찜복 안에 둔 채로 반납한 것이다. 돌아갈 시간이 없었다. 

 시험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 때까지 몇 군데의 회사로부터 '다음에 좋은 인연..' 어쩌고 하는 메일을 받았던터라 허둥지둥하며 치뤘던 이 회사의 합격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 회사에 다니고 있을 줄도 말이다.


 송파구에서 첫 터전을 구하는데 익숙한 학교가 보였다. '일신여상'이었다. 데자뷰가 어우러지듯 시험치던 날이 쭉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첫 터전이었던 송파동의 한 원룸에서 몇 년을 지냈다. 

 또 다시 집을 옮기게 되었을 때, 그리 먼 곳으로 가진 않았다. 석촌동의 한 빌라로, 조금 더 나아진 환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사를 하는데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 바로 그 찜질방이었다. 내가 이어폰을 잃어버리고 왔던 그 찜질방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어폰과 사원증을 맞바꾼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하룻밤의 기억을 간직한 석촌동에서 다시 4년을 살게 된다. 


 결혼을 준비하며 아파트를 찾게 되었다. 손에 닿지 않는 서울의 집값은 나를 잠실과 더 먼 곳으로 슬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 살고 있는 장소에 자리잡았다. 하남을 바로 보고 있는 오금동. 여전히 나는 송파구라는 장소에 살을 맞대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송파구에 대해 말을 이어가니 한없이 재미없고 건조해진다. 나는 지금의 직장을 매우 아끼고 사랑한다. 물론 모든 회사가 그러하듯 지금의 회사도 여러 모순과 폐해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어렵사리 들어온 직장이고, 애정을 갖고 다녔던 곳이라 소중하다. 아주 먼 훗날에도 나는 지금의 회사에 대해 긍정적인 단어들을 많이 엮어서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송파구에 대해서는 특별히 어떤 감정이 생기질 않는다. 무미건조하다.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느낌이다. 서울의 어떤 구로 가더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밥벌이를 위해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싫은 것도 아니지만. 

 입사 후 보낸 시간만큼을 딱 송파구에 살았는데 여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서울의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이 구의 지하철 정도는 기억한다는 점, 나름 운전할 때 지름길을 안다는 점 정도다. 


 내가 거쳐온 다른 동네들에 갖는 애정들만큼, 이 동네를 사랑하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별로 없다. 다만 밥벌이를 위해, 성장을 위해 머무는 곳인만큼 이 곳에서 머무는 내가 이 동네의 값어치만큼 넓고 큰 사람이 되길 바랄 뿐이다. 



덧. 

 이렇게 무미건조한 감정을 가진 동네이지만 많은 걸 이루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큰 병을 앓은 후 잘 극복했다. 승진도 했다. 책을 내기도 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아무 감정이 없는 동네처럼 묘사했지만, 나중에 다른 곳에 정착한 내가 송파구를 다시 떠올린다면, 이런 큰 일들을 이뤄온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길 수 있는 땅으로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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