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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May 31. 2020

나무 팽이 2

TEXTIST PROJECT

 '일년에 두 번 정도 외갓집을 간다. 갈 때마다 할아버지의 움직임은 더뎌진다. 여전히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시지만 할아버지의 세포들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 같다.'
 작년에 출간한 에세이집 중 '나무 팽이'라는 글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이틀 전 숨을 거두신 할아버지는 태극기에 쌓여 호국원에 자리하셨다.

 양기택 레오는 내 할아버지의 이름과 세례명이다. 할아버지는 92년동안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아니, 천주교를 증오하셨다. 아니,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살았다.
 내겐 고모할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고모, 즉 할아버지의 여동생이다. 할아버지는 여동생과 무려 스무살 가량의 나이차가 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탓에 할아버지가 딸처럼 키웠다고 한다. 딸처럼 키운 여동생은 나이가 들고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던, 애지중지하던 여동생이 수녀가 된다고 하니 집안이 뒤집어졌다. 할아버지의 반대를 이기고자 여동생은 단식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여동생에게 굴복했다. 하지만 신에 대한 원망이 남았던 모양이다. 할머니도, 자식들도, 손주들도 천주교 신자가 되어 할아버지께 권교했지만 천주교에 대한 할아버지의 원망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신에게 여동생을 빼앗겼다는 할아버지의 상실감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됐다. 신이 그를 가까이 불렀을 때, 이윽고 할아버지는 대세를 받았다. 대세를 받고 보름 정도가 지나고 신은 할아버지를 불렀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고모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친족 중에 수녀님이 있다는 것은 큰 자랑이었다. 하지만 명절 때 외할머니 손을 잡고 성당에 가면서도 왜 할아버지가 함께 가시지 않는지 별로 궁금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할아버지와 여동생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의 장례미사때서야 들었다. 이제 나는 이 이야기를 할아버지께 더이상 직접 여쭈어 볼 수가 없다. 그는 이제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오전, 나는 아내와 함께 할아버지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갔다. 아직 할아버지에게 결혼 후 손주며느리 자랑을 해드리지 못해서 마음 한 켠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아있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의 상태는 위중해 보였다. 호흡기를 꽂고 계신 할아버지는 갑갑하게 숨을 쉬고 계셨고 나오지 않는 가래기침을 뱉고 싶어 하셨다. 할어버지의 귀에 대고 "손주 인석이가 왔어요!"라고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대꾸할 힘이 없으셨지만 고개를 계속 좌우로 젓고 계셨다. 간호사는 충분히 다 듣고 계신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손은 땡땡 부어있었고 눈은 거의 붙은 것처럼 말라있었다.
 나와 아내가 도착할 무렵에 상황이 꽤 달라진 모양이었다. 간호과장은 자리에 있던 숙모를 따로 불렀다. 가족들을 모으길 권했고 임종실이 있는 층으로 할아버지를 옮겨야 할 것 같다고, 수치와 무관한 전문가의 감을 전했다. 길면 사흘 정도를 계실거라고 했다. 관할 성당의 사제와 수녀가 급히 달려왔다. 병자성사가 집행되었다. 할머니와 나, 아내, 숙모가 있었고 삼촌이 이윽고 달려왔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팽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나와 아내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길 권했다. 일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왔을테니, 걱정말고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떠나시면 바로 연락을 주기로 했다. 어른들은 할아버지가 수 일은 더 계실거라 믿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우리는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군산에서 출발해 성남정도 왔을 때, 전화가 왔다. 우리는 집에서 검은 옷을 챙겨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할아버지는 나를 기다리셨던 모양이다. 내가 할아버지를 뵙고, 처를 인사드리고, 걱정을 조금 풀고 돌아서자 길을 떠나신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의 시신은 희고 옅었다. 빈소에는 조문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온 근조기가 영정 왼편에 놓였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삼성에 들어갔다고 시골 동네에 자랑을 많이 하셨다. 이튿날에는 국가 보훈처에서 할아버지의 영정에 거수 경례를 하러 왔다. 오신 분들은 추가로 가져온 근조기를 삼성SDS 근조 기 옆에 세웠다. 대통령 근조기였다.
 초등학생 정도 되던 시절, 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6.25전쟁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십자가 깃발이 그려진 부대에서 뛰어다녔다고 했다. 현재의 의무병에 해당하는 위생병, 양기택 상병은 다행히 잔혹한 전쟁 중에 살아남았다. 할아버지의 공로는 인정되었고, 이제 자랑스럽게 호국원에 자리잡았다.

 이제 할아버지는 더 이상 팽이를 만들어 주실 수 없다. 밥상 앞에서 "느이가 깍두기를 좋아한다믄서?"라며 싸가라고 하실 수도 없다. 낡은 집 기둥 옆에 앉아서 부축해드릴까 여쭤보면 "돼았써."라며 허허 웃어주실 수도 없다. 외갓집을 고작 명절에나 다녔을텐데 되돌려보면 할아버지의 기억이 많다. '나무 팽이'에 썼던 것처럼 할아버지의 손재주는 삼촌에게 남아있다. 나에게도 희미하게 남았다.
 할아버지는 하얗게 남았고 생애동안의 조각을 자손들에게 남김없이 전했다. 자손들은 그 조각을 다시 내 세대로 전했다. 내 세대는 할아버지의 기억을 조각조각 간직하고 그리워하게 됐다.
 책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썼다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끝끝내 그게 마음에 남는다. 손주 인석이가,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팽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철심을 박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을 칠해주신 그 나무 팽이를 책에까지 담았다고 전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될 어느 날이 되면, 팽이 다시 만들어 달라고 아홉살 열살의 손주로 돌아가 졸라보고 싶다. 오래도록 기억해 왔노라고, 많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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