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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sueproducer Apr 09. 2020

[Ep2-9]청춘을 뒤흔든 조르바와 첫사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문학기행, 아홉번째 이야기

"일류대"라는 소속을 확보한 이후 주인공의 삶은 오히려 방향을 잃어버린다. 인천에서 그는 일류대를 다니는 뛰어난 인재로 통하지만, 정작 학교에 오면 모두가 일류대생이니 특별할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중성 속에서 명문 고등학교 출신의 친구들이 자기들만의 소속감을 공고히 하는 것을 목격하고, 오히려 같은 소속 속에서도 또 다른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일류대라는 소속감만 가질 수 있다면 될 듯했지만, 정작 소속을 갖추고 보니 그 안에서의 계층을 극복하기 어려움을 깨달은 것이다. 책에서는 하루 안에서 두 삶을 오고 가는 생활을 클립턴 행성 출신의 슈퍼맨이 지구에서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과 같다고 묘사했다.


주인공은 슈퍼맨처럼 학교 앞에 늘어선 공중전화 박스에서 두 개의 자아를 갈아입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 인천의 집과 서울의 캠퍼스를 전철로 오고 갔다. 돌이켜 보면 그건 지구와 클립턴 행성을 오가는 길고 긴 여행이었다. 분명 집이라는 이름의 지구에서 나는 슈퍼맨이었지만, 일류대라는 이름의 행성에서는 지구인이었다. 다행히 학교의 정문 앞에 엄청난 수의 공중전화 부스가 즐비해 있어, 변신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p.153)


결국 명문고등학교 출신의 친구들 대신 시골의 소박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자 그 친구 중 한 명의 소개로 자취방을 구하게 된다. 부모님께는 '통학 시간 때문에 공부가 뒤처진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 하숙집에서 가장 많이 한 것은 운동권 활동이었다. 하숙집 주인은 데모를 하는 순간 방을 빼야 한다고 엄포를 놨었지만, 신기하게도 그곳에는 누구보다 데모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주인공은 '남태령재'의 철거반대 시위에도 나가게 된다.


지금도 서울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려면 이 남태령을 넘어야 한다. 지금 풍경으로 생각해보면 허허벌판에 군부대만 있는 동네지만, 주인공이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1988년만 해도 그곳에는 강제 철거를 앞둔 불법 주택이 즐비한 동네였다. 강제 철거를 하려는 공권력 앞에서 자신들의 주거지역을 지키고자 하는 거주자의 반항은 너무나 미약해 보였다.


남태령고개의 불량주택을 정리하겠다는 1984년 10월 2일 자 중앙일보 기사,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행복나들이 광고가 시선강탈!


그 모습을 보면서 주인공은 오랜만에 다시 삼미 슈퍼스타즈를 떠올린다. 큰 점수를 내어주며 강팀에게 휘둘리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경기를 무력하게 바라보면서도, 계속해서 응원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똑같았다. 공권력에 맞서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거주자들을 돕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때의 삼미 경기를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듯, 시위에 나선 네 번째 날 강제철거를 하려는 사람에게 쇠파이프를 맞고 이제는 시위에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그날 이후 다시 무료한 삶으로 돌아오게 된다. 리포트를 내고, 학교에 가고, 출석만 부르는 권태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에 뜬금없이 홍대 근처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새 하숙집에 살던 친구의 소개로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요리도 할 줄 몰라서 제대로 된 안주 하나 없이 메뉴판에 건어물만 올려둔 술집 겸 카페의 사장 별명은 조르바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부모가 유산으로 남겨준 광산으로 새로운 사업을 펼치러 가던 주인공 앞에 갑작스럽게 조르바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조르바는 다소 거칠지만 동시에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주인공은 다양한 경험을 가진 조르바와 함께 광산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큰 투자를 해서 인프라 공사를 하고 첫 시험운영을 하던 중 정말 대차게 망한다. 망연자실한 주인공 앞에서 조르바는 그래도 괜찮다며 춤을 춘다. 책으로만 보면 제법 잘 추는 춤이었을 듯하지만, 영화로 보면 탈춤에 가까운 몸짓이다. 땡볕 아래 해변에서 파란 셔츠를 입고 춤추다 보니 선명한 겨땀 자국은 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춤추는 조르바. 가능한 겨땀 자국이 덜 난 사진으로 골랐다.


어찌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와 주인공의 관계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카페 주인 조르바와 주인공의 관계와 비슷하다. 카페 사장 조르바는 놀 줄 모르던 주인공에게 음악을 즐기고 삶을 낭비하듯 사는 방법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첫사랑이 허무하게 끝난 주인공에게 "군대를 가"라는 단호한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주인공 앞에서 보여준 것이 조르바 댄스만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대학교 생활을 보면 사는 곳이 어쩜 이리도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싶다. 인천과 학교를 지하철로 오가던 대학생 첫 학기에는 각 지역에서 일류대가 가지는 무게감이 다르다는 데서 괴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학교 바로 앞에서 자취하던 1학년 2학기에는 함께 살던 친구들 때문에 관심도 없던 정치적 고민과 일류대생이 지녀야 할 책임감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홍대 근처의 한적한 동네로 거취를 옮기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찾았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였지만, 그 동네를 돌아다니며 혼술을 해도 학교 근처에서의 삶과는 달리 풍요롭고 즐거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 길 위에 유독 미인이 많았다고 하니 오죽 즐거웠을까.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가게가 위치한 정문 쪽에서 상수동의 하숙집으로 이어지는 극동방송국 쪽의 길 위에서-내 인생의 첫사랑과 대면하게 된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필요 이상으로 극적인 만남이었다. 나는 그날 따라 길었던 술자리를 정리하고, 새벽 3시쯤 가게의 셔터를 내린 후 레드 제플린의 '락엔롤'을 흥얼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던 길이었고, 그녀는 극동방송국의 정문 옆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 중이었다. (p.170)


현재의 극동방송 한국지사. 상수역에서 홍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나름 그 동네의 랜드마크


책을 읽다가 작가의 덕력이 부담스러운 때도 종종 있었지만, 위 문장에 이르러서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저 동네는 새벽에도 사람이 넘쳐나는 홍대인데, 아무리 새벽 3시라 사람이 적고 만취한 상태라지만 정문 옆에서 노상방뇨라니. 작가의 성적 판타지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닐까.


흔히 홍대라고 부르는 지역이 합정역, 상수역, 홍대입구역을 연결하는 골든 트라이앵글이니까, 극동 방송국은 중심지에서 벗어나 있다고 이해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극동 방송국 정문 앞은 3차선의 도로지 않나. 아무리 관대하게 봐주려고 해도 인적 드문 골목길로는 보이지 않는다.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상수역으로 이어지는 이 길의 정식 이름은 와우산로다.


책에서는 극동방송국을 랜드마크로 삼았지만, 신발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와우산로라는 이름에서 운동화를 떠올릴 것이다. 홍대 정문에서 상수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외관부터 독특한 가게를 하나 만날 수 있다. 일반 매장과는 달리 스니커즈를 중심으로 하는 콘셉트 매장이다. 매장에 들어가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의 신발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에 넋이 빠지지만, 진짜 특이한 모습은 새벽에만 볼 수 있다. 한정판 디자인이 출시되는 날이면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밤새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만약 한정판 신발이 출시되는 날이었다면 주인공의 첫사랑은 차마 노상방뇨를 할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고, 주인공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인공은 와우산로를 따라 퇴근하던 중 극동방송 앞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하긴 그렇게 만났으면 뭐하나, 이 첫사랑은 비배타적인 애정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다가 1990년의 어느 날 편하게 살고 싶어서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한다. 깊은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카페 주인 조르바의 조언에 따라서 입대를 한다.


제대를 하면서, 나는 '소속'의 고민과 비슷한-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그곳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계급'이었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소속 안에서, 또 다시 여러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p.217)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주인공은 새롭게 깨닫는다. 소속보다 중요한 것은 "계급"이라고. 그리고 그 계급을 올리고 유지하기 위해서 프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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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발췌는 개정판 3쇄를 기준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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