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통영 문학기행, 다섯번째 이야기
김약국 삼 대가 그리 좁은 곳에서 평생을 산 것이 그들의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통영 시내가 어차피 그 정도의 크기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통영에서 버스를 타면 4시간 10분이면 서울에 닿는다. 하지만 그때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 지금과 크게 다르다. 먼저 통영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가야 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만 했다.
용빈이가 타고 다니던 것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기는 하지만, 1943년 경부선 시간표를 확인해봤다. 부산역에서 이른 아침 8시 10분에 기차에 오르면 12시 15분에 대구와 5시 26분에 대전을 거쳐 한밤중인 밤 11시에야 경성역에 닿는다. 통영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는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기차만 총 15시간가량을 타야 하는 대장정이다.
오늘날 15시간이면 비행기를 타고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갈 수 있는 시간인데. 이렇게 생각하면 당시의 통영 사람들에게 경성은 지금 우리에게 미국이나 유럽 같은 거리감이지 않았을까. 다른 지역으로 나간다는 것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나가는 것 정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을 수 있겠구나 하고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학교 때문에 경성을 오가던 용빈이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은 도통 그 반경 5km의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게다가 그 반경을 벗어나기 위해서 각오해야 하는 것은 장시간의 이동뿐만이 아니었다. 북쪽의 좁은 길목을 제외하면 삼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통영 지리의 특성상,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배를 타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몇 해 전 겪은 비극과 같이 해상교통은 사고위험이 크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물자와 인력을 운송하기 위하여 적정 정원을 초과한 경우에는 더더욱. 이런 불법적인 운항을 제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웠던 것일까. 1930년대의 신문에는 용옥이가 겪은 것과 같은 사고 기사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연안 항로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고들은 주로 정원초과나 나쁜 기상 조건 하에서 무리한 운항 등이 원인이었다. 특히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날 사고가 많이 났다. 1930년 통영에서 발생한 제일운항환 침몰 사고가 대표적이다. 1925년에 진수한 신조선이었지만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1930년 3월 4일은 통영 장날이었다. 거제와 통영을 오고 가던 거제운수주식회사 소유의 31톤 발동기선 제일운항환은 오후 4시 통양 부두를 떠나 거제로 출발하려는 터였다. 장을 보러 왔던 사람들은 이 배를 타야 거제로 돌아갈 수 있었고, 배가 떠나려 하자 표를 사지도 않고 앞 다투어 올랐다. 배가 잔교에서 멀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달려오던 두 사람이 배에 뛰어올랐다. 35명의 승객과 화물로 무게 중심이 위로 가 있던 배는 이 충격에 옆으로 기울었다. 쌓아 놓은 화물이 쏟아지면서 배에 물이 들어오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배들이 달려들어 승객을 건져 내면서 대부분은 목숨을 건졌으나 끝내 두 사람은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동아일보>> 1930. 3. 4 ; 1930. 3. 5
장시간의 피로와 사고의 위험은 모두 세상 밖으로 향하는 통영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사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그래서 나가기 힘들었구나”라는 이해뿐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세상으로 오가며 거래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겠다”는 의지도 느껴진다. 비록 많은 위험을 무릅써야 했지만, 분명히 변화의 활력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책만 보아도 항구는 언제나 지게꾼과 장사치와 마중 나온 사람들이 서로 뒤엉키는 활기찬 공간이다. 뱃고동 소리가 먼저 부웅 하고 들려오면, 오래 지나지 않아 불을 밝힌 윤선의 선체가 섬을 돌아 나타났다. 어슴푸레한 가스등 아래에서 건너보는 윤선의 조명은 분명 찬란해 보였겠지.
요즘에는 배를 탈 일이 많지 않아 그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지만, 윤선은 증기 기관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배를 뜻하는 말이란다. 더 이전의 배는 조류와 바람에 의존했던 전통적인 운항방식으로 움직였지만, 증기선의 등장 덕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게 했다. 배편 또한 정기적인 시간표에 의해 움직이면서, 사람들은 윤선을 물자 운반의 목적을 넘어 이동수단으로도 활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가 설립된 후,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배편이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장거리 항로는 물론 단거리 왕복 항로들이 늘어났고, 1930년대 즈음에는 배를 타고 도시 간 이동을 하는 것이 점차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영과 김약국의 식구들은 온몸으로 겪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여객선의 3등실을 타면 철도보다 더 싼 가격으로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가진 것이 많지 않더라도 약간의 위험을 각오한다면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이렇게 위험과 힘든 시간을 각오한 사람만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김약국네 식구 중에서는 용빈이만이 이걸 각오했다.
김약국의 딸들이라는 책 속의 수많은 등장인물 중 사실상 홀로 살아남은 것 또한 용빈이였다. 타고난 현명함도 하나의 생존 비결이었을 것이다. 용빈이는 경성 등의 대도시를 왕래하며 계속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넓힌 견문 덕분에 집안 전체에 휘몰아치는 비극 속에서도 자신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러 떠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용빈이는 통영에 머무른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자가 된 친언니가 있고 친척도 여럿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용빈이는 용혜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가는 배를 탄다. 교과서적인 해설에 따르면 배에서 통영을 돌아보는 용빈이의 감상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해설에 따라 “서울까지 다녀온 용빈이만 살아남고, 다시 더 넓은 지역으로 희망을 찾아 떠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 더 넓은 지역을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라고 땅땅땅 결론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나아가서 “그러니까 여러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여행도 막 다니면서 우리 모두 희망차게 삽시다!”라고 신나게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이 진심으로 안타깝다. 그렇게 빠르게 결론 내리기에는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더 넓은 세상을 돌아보며 새로운 것들을 다양하게 접했다고 해서 그 삶이 반드시 행복이나 성공에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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