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배경, 유자와 다카한료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p.7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 민음사)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입 중 하나로 손 꼽히는 장면을 실제로 눈에 담았다. 그날 밤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아름다운 문장을 낳은 료칸에 묵기로 했다.
진눈깨비가 덮기 시작한 야마가타현 아쓰미온천 あつみ温泉 에서 출발했다. 먼저 니가타 역으로 가서 기차를 갈아타고 에치고 유자와 越後湯沢 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우중충했던 아쓰미 온천의 아침과 달리 니가타는 화창했다. 니가타 역을 출발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깜깜한 터널로 들어갔다. 옆자리에서 신랑이 단잠을 자고 있었다. 대화할 사람도, 구경할 창밖 풍경도 없어져 심심해졌다. 기나긴 터널이 끝나고 빛이 기차로 스며들자 나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신랑을 흔들어 깨웠다.
“말도 안 되는 풍경이야.”
창밖엔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터널로 들어가기 전에는 파란 하늘 아래 황톳빛 땅이 뻗어 있었다.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어둑어둑한 하늘 밑에 순백색이 깔렸다. 소설 《설국》의 시작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康成 는 우리와 정반대 편 도쿄에서 출발하여 에치코 유자와에 닿았다. 아름다운 시작을 만든 충격적인 풍경은 반대편에서 달려간 우리에게도 선사되었다.
《설국》은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작품 안에 ‘유자와’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가 여행에서 만난 인연을 바탕으로 집필하였으며,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재(火災) 역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밝혔다. 소설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특별한 직업 없이 여행을 다니는 청년이다. 때때로 서양무용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한다. 어느 날 산행을 마치고 내려간 온천 거리에서 게이샤 고마코를 만난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같은 마을을 찾아간다. 어느 해 마을로 향하던 기차에서 요코라는 여성을 마주치고, 그녀에게도 마음이 끌린다. 여느 작품과 달리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이야기의 흐름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이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작품을 계기로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마무라가 머무는 료칸은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된다. 작가는 실제로 에치고 유자와의 다카한 료칸 高判旅館 에 머물며 설국을 집필했다. 증축을 한 다카한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위치는 그대로여서 소설의 묘사와 이질감이 없다. 예약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날 예약이 가능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눈이 펑펑 내리는 길을 걷고 싶다는 신랑을 만류하고 료칸에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했다.
길은 얼어 있었다. 마을은 추위의 밑바닥으로 고요히 가라앉았다. 고마코는 옷자락을 걷어올려 오비에 찔러 넣었다. 달은 마치 푸른 얼음 속 칼날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역까지 가요”
“돌았군. 왕복 십 리 길이야”
“당신은 곧 도쿄로 가잖아요. 역을 보러 가는 거에요”
⁃ 《설국》 중에서
십 리는 4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 에치고 유자와 역에서 료칸까지는 실제로 2km 남짓.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30분은 걸어야 다다를 수 있다.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트렁크를 질질 끌며 이 길을 걷자니…… 무모한 신랑의 모습이 고마코와 겹쳐졌다. 료칸에 짐을 맡기고 나서야 눈이 쏟아지는 온천마을을 걸어볼 마음이 들었다. 눈이 이렇게나 많이 왔는데 차가 다니는 길엔 눈이 쌓이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도로 위에 줄줄이 뚫린 작은 구멍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폭설로 스키장 운영이 어려운 것일까?
역 근처에서 우동 한 그릇을 먹고 나오니 눈발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엔 택시에 올랐다. 하루에도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다닐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붙였다.
“12월엔 항상 이렇게 눈이 많이 오나요?”
“음…… 매년 달라요. 어떤 해엔 정월이 되도록 눈을 전혀 볼 수 없을 때도 있고, 조금 이를 때도 있죠? 올해는 적설이 일찍 시작되었네요. 12월 초부터 이렇게 쌓이기 시작하니.”
올해 일본에 눈이 빨리 다가온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오타루에서 올린 우리의 결혼식 날엔 폭설로 공항까지 폐쇄되었으니…….
료칸 2층에는 이제는 없어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머문 방이 재현되어 있다. ‘가스미노마 かすみの間’라는 이름을 가진 방이다. 옆에는 자료관이 꾸려 있다. 작가와 작품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공간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 고마코의 실제 모델인 마쓰에 (본명 : 고다카 키쿠 小高キク)의 사진.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확실히 관능미가 흘렀다.
외관은 바뀌었어도 우리가 머문 객실 구조는 가스미노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내려다봤을 겨울 풍경을 밤늦도록 구경했다.
여전히 어두운 아침에 눈을 뜨니 눈이 더 펑펑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물을 뿜어내는 장치도 소용이 없어지고 있다. 아무도 없는 대욕탕에서 온천욕을 했다. 언제 《설국》을 처음 만났더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읽은 《설국》은 사실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이토록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에 가보지 못했고, 수려한 문장 사이사이에 감춰진 남녀의 감정을 들춰내지 못 했다. 밖을 내다보며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앉아 있으니 이곳까지 들어오며 만난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소설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 밤을 보내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긴 터널을 통과하여 눈의 고장을 빠져나오니 겨울햇살에 눈이 부셨다.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 《설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