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사키 서점들의 나날들' 배경, 도쿄 진보초 헌책방거리
'장서의 괴로움’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좋아하는 저자의 집엔 책이 너무 많다. 책 때문에 집이 무너질 것 같아 '장서술(책을 간직하는 기술)’이 필요하단다. 괴롭다며 비명을 지르지만, 표지 그림을 보아도, 내용을 읽어보아도 ‘행복한 비명’으로 들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 속에 파묻혀 살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행복한 일이 리라. 작가는 무려 3만 권의 책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학식이 뛰어난 학자들에게만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사가독서제라는 제도만 보아도 책을 한껏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시 '장서의 괴로움' 이야기로 넘어와서. 작가 오카자키 다케시 岡崎武志 는 자신을 '진보초계 라이터'라고 소개한다. '책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다. 대체 일본의 진보초는 어떤 곳일까.
오차노미즈 역에 내려 진보초를 지나가면서 언제나처럼 서점과 헌책방을 산책했다. 역시 마음이 허전했기 때문일까. 바로 전날 겨우겨우 1천2백 권을 처분한 주제에 여기저기 마음이 이끌려 헌책을 열일곱 권이나 사버렸다.
- '장서의 괴로움' 中
도쿄에선 친구와 식사를 하기로 한 일을 빼곤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진보초 神保町에 가보기로 했다. 간다에 있는 진보초는 서점, 헌책방,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세계 최대의 책방거리다. 간다 책방거리라고도 불린다. 1880년대 주변에 일본 법률학교, 메이지 법률학교 등 대학이 생기면서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법률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들이 들어섰다. 헌책방 거리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거의 200여 채의 서점이 남아 있고, 그중 약 140여 곳이 헌책방이라고 한다. 매년 가을에는 헌책 축제도 열린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은 책방이 줄 지어 있었고, 각각의 책방이 저마다의 특색이 있었다. 낯섦에서 오는 불안과 아마추어의 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은 기분이 뒤엉켰다. 오랜 시간 머물기 머쓱했다. 쭈뼛쭈뼛 대다 대형서점 산세이도 三省堂 를 발견. 그곳에 들어가니 그제야 겨우 한시름 놓았다. 보고 싶은 책이 모여 있는 코너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까의 헌책방에선 책에 손을 대는 일 조차 두려웠는데, 산세이도에선 마구마구 뽑아 든다. 사가지고 갈 책을 모으고, 아마존에서 주문할 책을 기록했다. 이런 마음은 나만의 마음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된 서점’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담겨 있었다.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어디에나 헌책방이 있으며 그 헌책방들은 왠지 손님이 가게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느낌이어서 내가 늘 향했던 곳은 ‘산세이도’나 ‘쇼센그란데’라는 일반 서점뿐이었다.
(… 중략…)
매우 오랜만에 찾아간 비 내리는 진보초는, 역시 당시와 마찬가지로 쌀쌀맞은 책의 거리다.
- ‘아주 오래된 서점’ 中
이 책은 소설가 가쿠타 미쓰요가 오카자키 다케시의 지령에 따라 헌책방을 순례하며 쓴 수필이다. 진보초 외에도 다이칸야마, 와세다, 가마쿠라 등의 헌책방 구석구석 살핀다. 심지어 해외 헌책방까지 진출한다! 물론 순례의 시작은 진보초. 마지막도 진보초였다.
‘아주 오래된 서점’, ‘장서의 괴로움’ 둘 다 좋은 책이지만 사실 진보초까지 내 발걸음을 움직인 장본인은 영화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이었다. 영화를 보고 원작 소설까지 하루에 다 읽어 버렸다. 작품의 주인공은 디자인 일을 하는 다카코. 어느 날 갑자기 애인으로부터 ‘나 결혼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충격을 받아 회사까지 관두며 애인과 회사를 동시에 잃게 된 다카코. 어른이 되어서는 왕래가 없던 외삼촌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허리가 좋지 못하니 진보초에 와서 고서점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2층은 빈 방이라 숙식도 해결할 수 있단다. 외삼촌의 헌책방은 작지만 6,000권에 달하는 책으로 채워있었다. 도쿄에 진보초라는 마을이 있는 줄도 몰랐던 다카코는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하며 책방 거리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간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묘했다.
큰길(외삼촌이 가르쳐준 야스쿠니 거리)을 따라 서점만 죽 늘어서 있었다. 오른쪽으로 봐도 서점, 왼쪽을 봐도 서점.
...산세도, 쇼센 등 눈길을 끄는 대형 서점도 있지만 더 이채로운 것은 작은 헌책방들이었다. 그것들이 주르륵 늘어선 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를 당당함마저 느껴졌다.
-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中
영화와 책으로부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기가 전해왔다. 실제 배경은 더욱 따스했다. 외삼촌의 책방 배경이 된 건물은 더 이상 헌책방은 아니었다. 창고로 쓰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2층 다락방에서 다카코가 내려다봤을 풍경 안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진보초.
흩뿌리고 떠난 봄비에 거리가 살짝 젖어있었다.
여전히 남은 습한 기운과 낡은 종이 냄새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